인천 팔미도에 있는 등대로, 소월미도(小月尾島) 등대, 북장자서 등표(燈標), 백암 등표와 함께 처음으로 등명기(燈明機)에 불을 밝힌 등대로 건립되었다. 서해와 남해에서 인천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자리하여 해상 교통의 중심으로 기능하였고, 1950년 9월 15일의 인천상륙작전에도 활용되었다.
1876년의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조선 정부는 1885년 3월에 농상공부 통신국 관선과가 항로표지(航路標識)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도록 법제화하였다. 하지만 예산의 어려움으로 인해 업무는 진행되지 못하였다. 1901년에 대한제국의 총세무사(總稅務司)인 브라운(John McLeavy Brown)은 관세 수입 가운데 25만원을 등대 건축 자금으로 충당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듬해 3월에 인천 차이나타운에 인천해관 해관등대국(海關燈臺局)이 설립되었고, 5월 16일부터 인천 항로의 팔미도, 소월미도, 북장자서, 백암 등 4곳에 등대를 건립하였으며, 1903년 6월 1일에 처음으로 점등하였다. 당시에 건립된 등대는 소월미도 등대를 제외하고 모두 현재까지 잘 유지되고 있다.
이 등대는 인천에서 약 16km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콘크리트와 석조를 함께 사용하여 지었다. 높이는 등탑 윗부분의 등명기를 포함하여 7.9m에 달하며, 평면은지름 4.67m의 원형이다. 출입구는 돌로 쌓아 육중한 느낌을 주고, 나무로 만든 오르내리창과 직선의 철제 사다리는 예전의모습 그대로이다. 특히 당시에 사용하였던 등명기에는 제작지인 파리와 제작회사 이름이 남아 있다.
1907년에 발행된『한국등대국(韓國燈臺局)』제1년보에는 팔미도 등대가 벽돌과돌을 섞은 연와석조(煉瓦石造)에 원형 평면을 갖춘 등대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 건물은 대체로 콘크리트구조로 구성되었다. 인천에 가까웠던 소월미도 등대와는 달리 인천과는 좀더 멀리 떨어졌으므로, 무거운 돌을 현장으로 옮겨 쌓기 어려워 재료를 바꾸었기 때문이다. 설계자는 덕수궁 석조전을 설계하였던 영국인 하딩(John Reginald Harding, 1858∼1921)이라고 전하지만, 일본인 이시바시 아야히코[石橋絢彦]라는 기록도 전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인 팔미도 등대는 1894년 공무아문이 설치되고, 1902년 5월 소월미도, 북장자서, 백암등표와 함께 건축에 착수하여 1903년 4월에 준공되었으며, 같은 해 6월 1일 국내 최초로 점등되었다. 이 등대는 대한제국이 건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로, 19세기 말∼20세기 초에 건설 기술이 변화한 과정을 잘 보여준다. 목조 중심의 전통 건축 방식에서 벽돌, 돌, 콘크리트 등의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고, 바다에서부는 바람에 저항하는 구조를 갖추면서 등명기 렌즈를 관리하는 광학기술 등이 반영되었다. 근대 공학 기술의 도입과 적용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 등대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