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예문 ()

건축
유적
문화재
인천광역시 중구에 있는 대한제국기 일본에 의해 설치된 반원형 또는 무지개 모양의 터널. 교통시설. 시도유형문화재.
정의
인천광역시 중구에 있는 대한제국기 일본에 의해 설치된 반원형 또는 무지개 모양의 터널. 교통시설. 시도유형문화재.
개설

홍예문은 대한제국기 철도건설에 참여한 일본공병대에 의해 건설된 터널로 1906년 착공하여 1908년 준공되었다. 이 때 지금의 동인천역 인경인선 축현역(杻峴驛) 방향으로 이동이 용이하도록 설치되었다.

역사적 변천

1876년의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은 인천의 조계지를 중심으로 점차 영역을 확대하고자 하였는데, 1905년의 을사늑약을 계기로 삼아 본격적으로 영역을 늘렸다. 하지만 조계지에서 만석동으로 가려면 지형적인 한계로 인해 서북쪽의 해안선을 거쳐 가야했다. 일본은 이러한 불편을 없애기 위해서 공병대를 동원하여 홍예문을 뚫기 시작하여 1908년에 완성하였다.

내용

인천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급격히 늘어나자, 일제는한정된 조계지를 벗어나 인천 전체 지역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고자 하였다. 특히 인천의 중심이었던 만석동과 연결할 필요가 있었는데, 송현동 언덕이 매우 높아 오고가기가 어려웠다. 이러한 이유로 아치형 터널인 홍예문을 뚫고 2차선의 도로를 개설하여 차량의 출입을 가능하게 하였다.

무지개처럼 윗부분이 둥근 홍예문은 전체 높이 13m, 폭 7m로, 일정한 크기로 다듬은 네모난 화강석을 쌓아 만들었다. 다만 옆면은 마름모 모양으로 다듬은 화강석을 축대돌쌓기로 쌓아 다른 면과 차이를 두었으며, 윗부분의 안쪽은 붉은 벽돌로 마무리하였다. 공사를 하면서 예상하지 못한 거대한 암벽을 만나 공사 기간이 오래 걸렸기 때문에, 당시 일본인들은 이 문을 ‘혈문(穴門)’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인천 자유공원에서 이 문을 지나면 인천항을 바로 내려다 볼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이 문은 화강석과 붉은 벽돌을 이용하여 아치형의 교통 시설을 쌓았던 기술을 확인할 수 있는 유적이면서, 일제의 세력 확장 흔적을 잘 보여주는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문헌

『사진으로 보는 인천항』(인천항만공사, 2007)
「통감부 시기 인천의 일본조계지 확장과 식민기반 구축」(김남희, 국민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1)
문화재청(www.cha.go.kr)
한국컨텐츠진흥원(www.kocc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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