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골유적은 목책 성곽으로서 내곽과 외곽이 이중으로 돌려져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성책유적이다. 1~2차 발굴조사 결과 출토된 유물의 양상으로 볼 때 5세기 후반 고구려가 금강 유역까지 진출한 후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남성골 산성은 금강의 북안에 위치한 세종시 부강면 부강리 남성골 마을의 동북쪽 해발 105m 산자락에 위치해 있다. 금강의 본류가 남쪽의 부용봉을 돌아가면서 북쪽으로 휘어든 곳에 부강리가 있으며, 서쪽에는 황우산 너머로 미호천이 금강에 합류하는 합강리가 있다.
산성의 전체적인 구조는 내곽의 성터와 북서쪽의 낮은 경사면 대지 부분, 그리고 동쪽의 능선대지 부분으로 구분된다. 내 · 외곽을 이중으로 돌린 목책(木柵)과 내곽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차단하는 4개의 방어용 도랑인 호(濠)가 있다. 또한 내곽 정상부 동문터에서는 석축 성벽의 흔적도 발견되었다.
2001년 1차 발굴조사 결과 이곳에서 다수의 수혈 구덩이와 토기 가마, 주거지가 조사되었다. 출토된 유물 중에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130여 점의 토기는 고구려의 수도인 지안(集安) · 환런(桓仁) 지역의 것과 같은 특징을 보인다. 함께 출토된 화살촉(鐵鏃)도 고구려 것으로 파악하였다. 2006년 2차 추가 발굴조사에서도 고구려계 유물인 흑색 긴 항아리(長胴壺)와 금제 귀걸이, 철제 말재갈(鑣轡)이 출토되었다. 한편 1~2차 발굴조사에서 5기의 고구려 온돌유구가 확인되었다.
남성골 산성의 축조 및 운영연대와 관련해서 산성의 목책 구덩에서 나온 숯의 방사성탄소연대 측정값이 5세기 후반으로 나왔다. 뿐만 아니라 출토된 고구려 토기의 기종과 문양 요소, 시루의 형식, 철촉의 형태와 촉두의 길이 등을 고려해 5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구려가 금강 유역까지 진출한 시기는 장수왕이 3만의 군사로 백제 한성(漢城)을 공략한 475년(장수왕 63) 이후일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경기 남부의 성남 판교동 · 용인 보정동 · 화성 청계리에서 발견된 고구려 돌방무덤(石室墳)이 출토 토기의 특징상 5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이해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 지역과 남성골 유적을 계기적으로 파악한다면, 고구려 장수왕은 475년 이후 한성-성남-용인-안성-진천에서 미호천을 경유해 금강 유역에 진출함으로써 백제를 압박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충주고구려비」가 건립된 5세기 중반 이후 고구려가 충주-괴산-보은 방면을 거쳐 청원 지역으로 진출한 후 5세기 중 · 후반에 일시적으로 축조 · 사용한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후자의 경우라면, 고구려의 금강 유역 진출 시기를 신라와 소백산맥 서쪽 방면에서 공방전을 벌이는 484년(장수왕 72) 이후 5세기 말까지로 좀 더 늦추어 볼 여지도 있다. 어느 경우이든 간에 남성골 산성은 5세기 후반 고구려의 금강 유역 진출을 알려주는 중요한 고고자료이다.
남성골유적은 고구려가 백제 한성을 차지한 475년 이후의 남방 진출 경로와 양상을 규명할 수 있는 중요한 고고자료이다. 경기 남부에서 지속적으로 발굴조사되고 있는 고구려계 무덤과 남성골 인근 금강 유역에 소재한 고구려계 유물 · 유적의 종합적인 검토를 통해 5세기 후반 고구려 남방 진출의 실상을 좀 더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