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담의 생몰년대 및 활동에 대해 자세히 전하는 것은 없고,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조에 활동모습이 전한다. 향가인 안민가와 찬기파랑가를 지었다.
경덕왕이 재위 마지막해(765) 3월 3일에 경주 귀정문 누각에 올라서 신하들에게 잘 차려입은 승려를 데려오라 했는데, 신하들이 정말 깨끗하게 잘 차려입은 승려를 데려오자 아니라고 하였다. 마침 이 때 충담사가 장삼을 입고 앵통(대통)을 메고(혹은 삼태기) 남쪽으로부터 오자, 경덕왕이 그를 보고 기쁘게 맞이하면서 대화를 하였다.
경덕왕이 차를 한 잔 부탁하자 곧 차를 달여서 주었는데, 차의 맛이 독특하고 찻잔에서도 특이한 향이 진하게 풍겼다. 경덕왕이 기파랑을 찬민한 찬기파랑가를 언급하며, 자신을 위해서도 백성을 편안히 다스릴 수 있도록 향가 한 수를 지어달라고 부탁하자 안민가를 지었다.
향가의 내용 중에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라는 표현이 있는데, 유교적 충군사상이나 정명사상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어 당시 유교와 불교의 사상적 관계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또한 그의 법명이 충담사라는 점도 의미있는데, ‘충성스러운 이야기를 하는 승려’ 정도로 뜻풀이되므로 왕권과 국가의 안정에 일정한 역할을 했던 인물로 볼 수 있겠다.
그리고 그가 앵통을 메고 차를 달였다는 사실에서 승려를 중심으로 다도 문화가 상당히 넓게 퍼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흥덕왕 3년조에 당나라에 갔던 사신 대렴(大廉)이 차나무 종자를 가지고 오자 지리산에 심게 했다는 기록보다 반세기 앞선다. 물론 선덕여왕대부터 차가 있었다고 한 기록도 부가되어 있음을 볼 때, 흥덕왕대 차나무 종자의 도입은 다도문화에 전환점이 되었다고 하겠다.
경덕왕이 왕사(王師)로 봉하였으나 사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