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 말이산 4호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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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말이산 고분군 / 도항리 고분군
함안 말이산 고분군 / 도항리 고분군
고대사
유적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에 있는 삼국시대 아라가야의 구덩식돌덧널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이칭
이칭
함안말이산34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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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에 있는 삼국시대 아라가야의 구덩식돌덧널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내용

말이산고분군은 산등선을 기준으로 서쪽은 도항리, 동쪽은 말산리인데 함안말이산4호분은 말산리에 속해 있다. 말이산은 해발 40∼70m의 나지막한 구릉으로, 남북으로 1.9㎞ 정도 길게 뻗어 있는 주능선과 서쪽으로 완만하게 이어지는 여덟 갈래의 가지능선을 가진 산이다. 말이산의 지리좌표는 경도 35° 27′37.36″N, 위도 128° 40′40.6″E이다. 말이산의 어원은 머리산에서 온 것으로 보이며, 안라국(安羅國:아라가야)의 왕족과 지배층이 묻힌 신성한 산이라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국가에서는 이 고분군을 사적으로 지정하여 보호·관리하고 있다. ‘사적 도항·말산리고분군’이라고 부르던 것을, 혼란 방지를 위해 2011년 7월 28일부터 ‘사적 함안말이산고분군’으로 변경하여 관리하고 있다. 함안군에서 고분번호를 부여하여 관리하고 있는 가야시기 봉토분은 모두 37기이다. 가장 북쪽에 위치한 1호분부터 남쪽으로 진행하면서 주능선-가지능선 순으로 일련번호가 붙여져 있다. 북쪽으로부터 4번째 고분이 4호분이다. 한편 이 4호분은 34호분으로 불리어졌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 조사 때 붙여진 것이다. 고분군의 남쪽으로부터 번호를 부여했기 때문에 34호분이 된 것이다.

한편, 1991년 국립창원대박물관의 정밀지표조사 결과, 기존 37기를 포함하여 모두 113기의 봉토분이 확인되었다. 또한 그간의 발굴조사 성과로 보면 봉토가 삭평되어 원형을 잃어버린 것도 많다. 이러한 고분 모두를 포함하면 말이산고분군 내에는 1,000기 이상의 가야시기 고분이 조영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단일 고분군으로서는 국내 최대급 고분군이다.

이러한 말이산고분군과 그 주변에는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산 흔적이 보이며, 청동기시대의 주거지와 논 유적도 확인된바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적은 가야시기 들어 형성되었으며 아라가야의 전성기인 5세기 후반∼6세기 초에 축조된 분묘유적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근대(近代) 이후의 개발로 인해 이 유적이 갖고 있던 본래의 모습은 많이 변형된 상태이다.

말이산4호분에 대한 조사는 1917년 10월 14일부터 10월 26일까지 약 10여 일간 진행되었다. 당시 쿄토제국대학교수였던 이마니시 류[今西龍]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조사기간만으로 보더라도 거의 도굴수준에 가까운 졸속 발굴이었다고 생각된다.

말이산4호분에서 나온 유물은 수레바퀴토기를 비롯해, 불꽃무늬토기, 두 개의 달항아리(대옹)을 비롯한 120여 점의 토기와 대도, 말갑옷 조각과 각종 말장신구, 화살촉 등의 각종 무구류들이 있다.

일제강점기 말이산고분군 조사의 목적은 식민지 통치와 관련해서였다.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지역을 200년 동안 지배, 통치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해 내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말이산4호분의 발굴 결과는 그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4호분의 유물들은 오히려 안라국의 위대한 모습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왜(倭)보다 앞선 문화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4호분에서 나온 토기류들은 일본 고대 선진 외래계 토기의 원류임이 확인되었고, 유수한 철기문화의 왜로의 전래도 가야지역에서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함안말이산4호분은 수혈식석곽묘(竪穴式石槨墓: 구덩이식 돌덧널무덤)이긴 하지만 벽체의 최하부만 지표의 암반을 일부 파고 들어가 축조한 지상식(地上式) 구조이다. 측벽은 할석(割石)을 사용하였고 바닥은 편평한 판상석(板狀石석)을 이용하였다. 곽내부는 길이 9.69m, 높이 1.67m, 폭 1.73m로서 말이산고분군 중 최대급이다. 5개의 감(龕) 또는 감실(龕室)은 이 고분의 가장 중요한 구조적 특징 중 하나이다. 최근에는 이 구조를 뚜껑돌을 받치기 위한 버팀목 끼움 시설로 보고 있다. 무덤 둘레돌(護石)은 별도로 설치하지 않았다. 순장이 이루어졌는데, 순장자는 5내지 6인으로 추정된다. 고분의 축조 시기는 5세기 후반 대로 보고 있다.

참고문헌

『이야기로 떠나는 가야 역사여행』(이영식, 지식산업사, 2009)
『함안 말이산 4호분』(국립김해박물관·함안박물관, 2007)
『도항리·말산리유적』(경남고고학연구소, 2000)
「아라가야에 대한 고고학적 검토」(이주헌, 『가야 각국사의 재구성』, 혜안,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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