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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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지명
가야의 한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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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가야의 한 나라.
내용

우리 측 기록에는 보이지 않고, 「양직공도(梁職貢圖)」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다라(多羅) 또는 다라국(多羅國)의 형태로 보이는 가야의 한 나라이다. 「양직공도」는 중국 남조의 양(梁) 나라에 온 사신들을 그린 그림이다. 양 무제(502~549) 때에 소역(蕭繹, 508~554)이 그리고 그 머리말을 지었는데 만들어진 시기는 526~539년 사이로 추정된다. 각국 사신을 그린 그림의 옆에는 그 나라에 대한 설명이 붙어 있다. 가야사와 관련하여서는 백제 옆에 있었던 소국들의 위치와 성격이 일찍부터 주목되었다. 백제에 대한 설명문 속에, ‘백제 인근의 소국에는 반파(叛波)·탁(卓)·다라·전라(前羅)·사라(斯羅)·지미(止迷)·마련(麻連)·상사문(上巳文)·하침라(下枕羅)가 있다’고 하여, 백제 근처에 위치한 나라의 하나로 다라가 등장하는 것이다.

『일본서기』 흠명(欽明) 2년(541) 4월조에 ‘다라의 하한기(下旱岐) 이타(夷他)’라는 기록이 있다. 하한기는 다라국의 관직이며 이타는 인명으로 보인다. 이는 이미 신라에 병합된 금관가야(金官伽耶) 등을 재건하기 위하여 백제 성왕이 주재한 회의에 참석하는 인물이다. 임나부흥회의 또는 임나복건회의로 불리는 이 회의는 당시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의는 544년에 한번 더 개최되었다. 이때도 다라는 회의에 사신을 파견하고 있다. 이수위(二首位)의 직위에 있는 흘건지(訖乾智)라는 인물이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보면 다라는 관직제도를 갖춘 나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라는 가야 멸망 기사인 562년(흠명 23) 춘정월조에도 보인다. ‘신라가 임나의 관가를 쳐 없앴다. … … 통틀어 임나라 하고, 세분해서는 가라국(加羅國)‧안라국(安羅國)·사이기국(斯二岐國)·다라국·졸마국(卒麻國)·고차국(古嗟國)·자타국(子他國)·산반하국(散半下國)·걸찬국(乞飡國)·임례국(稔禮國)이라고 하여 합해서 10국(國)이다’라고 한 기사에서 보이고 있다. 이로 보면 다라는 신라의 침략에 끝까지 맞서다 멸망한 대가야와 최후를 같이한 가야국으로 보인다. 그 멸망의 시기는 562년으로 추정된다.

다라의 위치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에 소재하였을 것으로 비정해왔다. 이는 합천의 옛 이름이 대량(大良), 또는 대야(大耶)로, 다라와 음이 비슷하기 때문이었다.

한편, 경상남도 합천군 쌍책면에 소재한 옥전고분군에 대한 조사가 국립경상대학교에 의해1985년 이래 다섯 차례 행해졌다. 3,000여 점의 유물과 함께 독특한 구조의 유구 및 갑주, 마구, 보관을 비롯한 호화로운 귀금속제 장신구 등이 출토되었다. 유구와 유물의 양과 질은 어떤 타 가야 고분 출토품에 비해 보더라도 손색이 없는 우수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후 이 옥전고분군은 곧 다라국 지배집단의 묘역으로 보고 있다. 더구나 고분군과 1㎞ 정도 떨어진 곳에 다라리(多羅里)가 존재한다는 점은 이곳에 다라국이 존재했었다는 유력한 근거가 되고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일본서기(日本書紀)』
『옥전고분군과 다라국』(조영제, 혜안,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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