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수혼 ()

고대사
제도
형제가 죽은 뒤 그 처를 취하여 아내로 삼는 혼인 풍속.
이칭
이칭
수계혼(收繼婚), 역연혼(逆緣婚), 연대혼(連帶婚), 레비레이트(levir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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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형제가 죽은 뒤 그 처를 취하여 아내로 삼는 혼인 풍속.
개설

광범위한 지역과 여러 종족 사이에 널리 행해졌으며, 지금도 일부 지역에서 행해지고 있는 혼속이다. 한자로는 형의 처를 취하여 아내로 삼는다는 뜻이지만, 동생의 처를 취하는 예도 적지 않으며 생모를 제외한 아버지의 처나, 백모(伯母) · 숙모(叔母)를 취하기도 한다.

내용

『삼국지』 동이전에 부여의 혼속으로 소개되었으며, 고구려에서는 고국천왕이 후사 없이 죽은 뒤 그 아우인 산상왕이 고국천왕의 왕비를 다시 왕비로 삼았다고 하여 취수혼의 구체적인 실례를 보이고 있다.

한편 『삼국지』 동옥저전(東沃沮傳)에서 언어나 음식 · 거처 · 의복 등의 예가 고구려와 비슷하다고 했으며, 예전(濊傳)에서 시집 장가가고 상례와 장례를 치르는 풍습이 고구려와 비슷하다는 표현을 통해 동옥저와 예에서도 취수혼이 행해졌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다만 삼한 및 이를 이은 신라와 백제사회에서는 취수혼에 대한 전승이 보이지 않아 북방 유목민족 계열에서 주로 행해졌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변천과 현황

고구려 산상왕의 실례를 중심으로 취수혼이 행해진 시기나 배경에 대해서는 다양하게 해석하고 있다. 고구려 산상왕의 사례는 왕실이라고 하는 특정집단에 의해 이루어진 예외적인 현상으로 보는가 하면, 당대인들이 바람직하게 여기는 선호혼으로 널리 행해졌다는 해석도 있다. 선호혼으로 널리 행해졌다고 보는 경우는 취수혼의 배경을 친족 구성원간의 공동체적 성격이 강한 사회에서 행해지던 습속으로 고구려 초기 왕위의 형제계승과 관련성을 지적하였다.

그런데 취수혼의 사례가 보이는 산상왕대는 고구려 왕실이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전환되는 시기로 왕권강화 과정에서 부자상속을 확실하게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추구되었다는 해석도 있다. 고구려 동천왕대 이후는 취수혼이 더 이상 확인되지 않아 왕실에서는 3세기 전반에, 그뒤 점차 일반적으로 소멸되어 간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취수혼이 소멸된 배경으로는 사회분화의 진전과 함께 친족관계의 분화와 한(漢)문화의 영향을 지적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취수혼은 여성의 재혼으로 발생할 수 있는 혈족의 인적 · 물질적 손실을 막기 위한 방편임과 동시에 생활 능력이 부족한 과부와 그의 가족을 혈족이 보호해 주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지(三國志)』
「고구려 산상왕의 "취수혼 사건"」(엄광용, 『사학지』 38, 2006)
「2세기말 3세기대 고구려의 왕실혼인 -취수혼에 대한 재검토를 중심으로-」(김수태, 『한국고대사연구』 38, 2005)
「고구려 혼속에 관한 소고」(박정혜, 『인문과학연구』 16, 성신여자대학교, 1997)
「고구려가족제도와 취수혼제」(이영하, 『논문집-인문·사회과학편』 25, 공주사범대학, 1987)
「고구려 초기의 취수혼에 관한 일고찰」(노태돈, 『김철준박사 화갑기념 사학논총』, 1983)
「조선원시제종족의 혼인」(장승두, 『조선』 281·282,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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