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이속민단편련처 ()

근대사
단체
1927~1928년 재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이 중국, 일본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중국 취안저우(泉州)를 중심으로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하에 조직한 기구.
이칭
이칭
민남25현민단편련처(閩南25縣民團編練處)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1927~1928년 재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이 중국, 일본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중국 취안저우(泉州)를 중심으로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하에 조직한 기구.
설립목적

취안저우·융춘(永春) 지역에 혁명 근거지를 건설하고, 이를 아나키스트 운동의 지반으로 삼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연원 및 변천

천영이속민단편련처(泉永二屬民團編練處)는 중국 아나키스트 친왕산(秦望山)의 제의에서 비롯되었다. 친왕산은 취안저우에서 군사정치 간부를 양성할 목적으로 량롱광(梁龍光)과 함께 샤먼(厦門) 다이통(大同) 부근에 선전원양성소를 설치하여 군사훈련을 시켰다. 또 각 현에 농민협회를 조직하고 있었는데, ‘청당(淸黨)’사건을 기해 체포령이 떨어졌다. 수주란(許卓然) 등은 선전원양성소를 1927년 5월 초 샤먼으로 옮기고, 친왕산은 체포를 피해 상하이로 갔다.

친왕산은 1927년 6월 하순 량롱광(梁龍光)과 함께 이정규(李丁奎) 등을 방문하고, 취안저우를 중심으로 한 농민 자위 조직 건설에 동참할 것을 제의하였다. 당시 상하이에서 공산주의자에 맞서 노동 단체의 간부를 양성할 목적으로 노동대학 설립을 준비하고 있던 이정규·이을규(李乙圭)·우커강(吳克剛)·이와사사쿠타로(岩佐作太郞) 등은 격렬한 토론을 벌인 끝에 이 제의를 받아들여 푸젠(福建)에서 무장 자위 조직으로 농민들을 조직화하는 사업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정규·량롱광·친왕산 등이 6월 말에 샤먼으로 먼저 출발하였으며, 류기석·이기환·이을규·류지청·이양영[이상 한국인 아나키스트], 아카가와케이라이(赤川啓來)·이와사사쿠타로[이상 일본 아나키스트], 판텐준(范天均)·천준렁(陳君冷)[이상 중국 아나키스트] 등이 차례로 합류하였다.

1927년 7월 1일부터 강의를 시작하여 9월 말에 학과를 마쳤는데, 수료기가 끝나가면서 취안저우로 돌아가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하지만 장제스(張介石)의 반공 쿠데타로 중국의 정황이 매우 혼란스러워졌다. 9월 하순 친왕산은 수주란·다이진후아(戴金華) 등과 함께 푸저우(福州)와 난징(南京)의 정국을 시찰하러 떠났다. 친왕산은 난징에서 국민당 중앙당부로부터 푸젠성 당화교육훈련소(福建省黨化敎育訓練所)를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았고, 이에 대해 토의한 결과 훈련소를 맡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친왕산 등은 천밍수(陳銘樞)의 제11군이 푸젠성으로 진입하자 이를 따라 민남25현민단편련처(閩南縣民團編練處)라는 기치를 내걸고 취안저우에 입성하였다. 11월에는 개청식을 거행하였는데, 관할 지역을 푸젠성 정부의 요청에 따라 취안저우·융춘 중심의 11현으로 축소하고, 명칭도 천영이속민단편련처로 개칭하였다. 친왕산이 본부 위원장에 취임하고, 비서장에는 이정규, 총무부에 정진리(鄭今日)·이을규[회계 담당], 조직 연락부에 어우양잔핑(歐陽健平)·판텐준, 선전 교육부에 류기석·량롱광·장치엔디(張謙第)·장종런, 훈련 지도부에 천춘페이(陳春培)·이기환·류지청 등이 배치되었다.

민단편련처는 각 지역에서 조직을 결성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제11군의 남하 이후 있었던 토비(土匪)의 공격과 극심한 자금난으로 인해 1928년 2월 중순 이후 거의 모든 활동이 중지되고 말았으며, 화교로부터의 자금 지원마저 불가능해지면서 깃발을 내렸다.

기능과 역할

천영이속민단편련처는 중국, 일본,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이 합작하여 자신들이 꿈꾸던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취안저우에서 전개한 농민 자위 운동을 총괄하였다. 그 과정에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으면서 공산주의자들에 대해서 대항하였다.

의의와 평가

천영이속민단편련처가 주도한 농민 자위 운동은 재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 운동의 주요한 흐름 중의 하나이다. 중국에서의 아나키스트 사회 건설을 지향하였다는 점에서 이상촌 건설 계획과 마찬가지로 민족해방운동으로 규정하기에는 곤란한 점이 있다. 하지만 혁명 근거지 건설과 그것의 전 지역으로의 확산을 통한 아나키스트 사회 건설은 일본 제국주의 타도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민족해방운동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농민 자위 운동은 국민당 정부 권력과의 타협 하에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아나키즘 본령에 충실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국민당 정부군의 무력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던 점은 농민 자위 운동이 실패하게 된 하나의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자력에 근거하지 않고 국민당의 힘을 빌어 사회혁명을 완수하고자 함으로써 많은 문제점을 노정케 되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한국의 아나키즘-운동편』(이호룡, 지식산업사, 2015)
『30년 방랑기-유기석 회고록』(유기석, 임원빈 역, 국가보훈처, 2010)
「泉州 무정부주의운동에 대한 초보적 연구-조선혁명가와 중국무정부주의 운동의 관계를 중심으로」(蔣剛,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6, 한국민족운동사학회, 1997)
「중국 福建省 농민자위운동과 한국 동지들의 활동」(이정규, 『우관문존(又觀文存)』, 삼화인쇄출판부, 1974)
「有吉公使暗殺陰謀不逞鮮人一味檢擧に關する件」(上海總領事 石射猪太郞, 『亞細亞局機密』 第340號, 1933.3.27)
「訪問范天均先生的紀錄」(葛懋春·蔣俊·李興芝 編, 『無政府主義思想資料選』 下, 北京人民大學出版社,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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