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9월 천위이치가 이정규(李丁奎)에게 이상농촌 건설 사업을 제의하면서 재중국 한국인들의 이상촌(理想村) 건설 계획이 수립되었다. 저우씨(周氏) 성(姓)의 아나키스트가 소유하고 있는 농지를 기반으로 이상적 농촌 사회를 건설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결국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였다.
중국에서는 5·4운동을 전후한 시기에 ‘신촌운동(新村運動)’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그 연장선상에서 1920년대 초에 이상촌을 건설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1923년 9월 천위이치가 이정규에게 이상농촌 건설 사업에 참가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이정규, 이을규(李乙圭), 이회영(李會榮) 등 재 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의 이상촌 건설 계획이 수립되었다.
이상촌 건설 계획의 내용은 저우씨(周氏) 청년 아나키스트가 소유하고 있는 중국 후난성 한수이현 동정호반(洞庭湖畔)의 양타오촌을 중심으로 한 광대한 농지에 한국인 인삼 경작자를 다수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을 중심으로 자유 합작의 이상농촌 건설 조합을 만들고, 이를 통하여 공동경작·공동소비·공동소유하는 마을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 계획은 저우씨 마을 내부의 사정으로 결국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
이상촌 건설 계획은 재 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이 전개한 최초의 혁명 근거지 건설 운동으로서 자주적 콤뮨 건설을 목표로 하였다. 이 계획은 중국에 이상 농촌을 건설하고자 한 점에서 민족해방운동으로 규정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지만, 아나키스트 사회 건설이 일본 제국주의 타도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한국인의 민족해방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상촌 건설 계획은 민족해방운동의 물적 기반을 전적으로 중국인에게 의존함으로써, 자기 문제는 자기 스스로 해결한다는 아나키즘의 기본 원칙에서 벗어나는 등의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