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상 ()

근대사
인물
대한제국기 전라남도 해남 · 진도 등지에서 활약한 의병.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7년
사망 연도
1909년 1월 7일
출생지
충청북도 괴산
대표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2003년)
내용 요약

이필상은 대한제국기 동우회에 가입하여 활동한 의병이다. 1907년 7월 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하자 이에 항의하여 총리대신 이완용의 집에 불을 질렀다. 이 일로 진도로 유배되었으나 탈출하여 해남 일대의 의병과 함께 진도읍 습격 계획을 추진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본서로 호송 중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호송 경찰의 총격으로 순국하였다.

키워드
정의
대한제국기 전라남도 해남 · 진도 등지에서 활약한 의병.
인적 사항

이필상(李弼相)은 1887년 충청북도 괴산군(槐山郡)에서 태어났다. 직업은 교사였으며, 동우회(同友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주요 활동

동우회는 홍재칠(洪在七)과 다카하시〔高橋久司〕 등이 한 · 일 양국의 국조숭경(國祖崇敬), 양 국민의 정신적 화목과 교육 · 자선 · 주1 발달을 목적으로 창립하였으며, 초대 회장은 이윤용(李允用)과 도우즈〔到津公凞〕였으며, 서울 중곡동에 사무소를, 서울 5부(五部)에 지부를 두었다.

1907년 7월 헤이그특사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로 해산당하고 일본의 외무대신 하야시 다다〔林董〕가 고종(高宗)의 퇴위 및 일본 황제에게 사과할 것 등을 거론하며, 국권을 위협하자 동우회 제2대 회장 윤이병(尹履炳), 부회장 김재붕(金在鵬), 이사 이근우(李根雨) · 홍재칠 · 이광수(李光洙) 등과 함께 죽기를 각오하고 총리대신 이완용의 집에 불을 질러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이 일로 주모자 윤이병은 종신 주2을 받았으며, 이필상은 주3이라 하여 10년 유형을 받고 진도에 유배되었다.

1908년 11월 이필상은 진도에서 탈출하여 해남군으로 들어와 동(同) 우수영(右水營) 부근에서 지역민들에게 항일 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진도읍을 공격하려는 의병진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1909년 1월 4일 진도에 출장 중이던 일제 순사(巡査)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으며, 본서(本署)로 이송 도중 7일 오후 7시경 해남군 개초리(開初里) 인근의 산중에 이르렀을 때 야음을 틈타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감시하던 순사의 총격을 받고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200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고종순종실록(高宗純宗實錄)』(1908. 1. 16.)

단행본

『진도군지』(진도군, 전남대학교 호남문화연구소, 2007)
『독립유공자 공훈록』 15(국가보훈처, 2003)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3(국사편찬위원회, 1984)

잡지

『官報』(1908. 1. 25.)

판결문

「判決書」(平理院, 1907. 12. 29.)
주석
주1

생산물을 늘림.    우리말샘

주2

구형(九刑) 가운데 죄인을 귀양 보내던 형벌. 죽을 때까지 유배지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감형되거나 사면되는 경우도 있었다. 죄의 가볍고 무거움에 따라 장소의 멀고 가까움이나 주거지의 제한 정도에 차등을 두었다.    우리말샘

주3

형법에서, 남의 범죄 행위를 도움으로써 성립하는 범죄. 또는 그 범인.    우리말샘

집필자
황민호(숭실대학교 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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