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신촌리 토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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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유적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에 있는 남북국시대 이후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성곽. 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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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에 있는 남북국시대 이후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성곽. 토성.
개설

신촌리토성은 나주시 반남면 신촌리 성내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자미산 기슭과 구릉성 산지의 능선을 따라 축조되었으며,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 초기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토성(土城)이다.

신촌리토성에서 북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에는 신촌리고분 4·5·6호가 위치하고, 남서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곳에 자미산성(紫微山城)이 위치하고 있다. 주변에는 400m 내외의 구릉성 산지가 산재하고, 그 사이로 소규모의 곡간평지가 형성되어 있다. 성벽이 남아 있는 곳은 마을 동쪽에 위치한 구릉의 남쪽 사면 말단부이며, 성내마을 뒤를 감싸는 구릉 방향과 직교하도록 이어 붙여 성내마을 앞쪽으로 진행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남아 있는 길이는 10m 정도이고, 마을 앞쪽의 성벽은 민가와 경작지가 조성되면서 모두 파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성 내부에는 민가가 들어서 있고 평지에 해당하는 서쪽은 논과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성 외부 구릉은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내용

신촌리토성은 2007년 7월에 처음으로 확인된 이후 2003년에 시굴조사가 실시되어 토성의 존재와 함께 성벽의 축조방식이 확인되었다. 성벽은 대부분 구릉의 경사면을 따라 조성하였지만, 부분적으로 성토하여 바닥면의 수평을 맞추기도 하였다. 또한 성벽은 자연구릉 경사면에 토루를 이어 붙이면서 양쪽 기저면에 호석을 설치하는 방식으로 축조되었다. 양 호석열의 간격은 약 2.7m이고, 거칠게 다듬은 할석을 1∼2단으로 쌓아 조성하였지만 부분적으로 폐기와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체성부는 호석열을 덮으면서 판축하였다. 판축의 두께는 4∼20㎝로, 풍화토와 점토를 번갈아가며 쌓았으나 정연하지 않으며 영정주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현재 남아 있는 체성부의 크기는 넓이 약 2.7m, 높이 약 1.3∼1.6m이다.

출토유물은 고려시대 기와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자기류와 토기류도 다량 수습되었다. 명문기와는 ‘관(官)’명과 ‘반남(潘南)’명 기와가 수습되었다. 특히 ‘반남’명 기와는 757년(경덕왕 16) 이후에 이곳이 반남군으로 개편된 사실로 미루어 축조시기를 통일신라시대까지 올려볼 수 있는 가능성도 제시해주고 있다. 자기는 백자가 주종을 이루고 있지만 분청사기, 청자 등도 다량 출토되었다. 토기는 대부분 고려시대에 해당하는데, 성벽 기초부에서 출토된 일부 토기편은 삼국시대에 제작되었다.

참고문헌

『한국고고학전문사전: 성곽·봉수편』(국립문화재연구소, 2011)
『나주 신촌리 토성』(전남대학교 박물관·나주시, 2005)
집필자
김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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