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완오리 제철유적 ( )

조선시대사
유적
충청북도 충주시 대소원면에 있는 조선시대 제철 관련 유물산포지. 제철유적.
이칭
이칭
충주 완오리 야철지/충주 완오리 제철유적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대소원면에 있는 조선시대 제철 관련 유물산포지. 제철유적.
개설

우리나라 최대 철산지(鐵産地) 중 하나인 충주지역에서 가장 먼저 조사된 제철유적이다. 제철로 2기를 비롯해 건물지·석렬 등의 관련시설이 조사되었으며, 철광석·유출재·철괴·송풍관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땅을 파고 할석을 쌓은 다음 안쪽에 진흙을 발라 원형 혹은 모를 죽인 방형의 노를 조성하였으며, 철광석을 제련해 단조철기 소재용 괴련철(塊鍊鐵)을 생산한 유적으로 판단된다.

역사적 변천

충주는 울산과 함께 고대로부터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철이 생산된 곳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황후기(神功皇后記) 52년조에 의하면 백제 근초고왕이 왜(倭)의 사신 이파이(爾波移)에게 비단·활·화살과 함께 철정(鐵鋌) 40매를 하사했으며, 근초고왕이 하사한 칠지도(七支刀)의 제작지가 곡나철산(谷那鐵産)이라고 한다.

『고려사(高麗史)』 지리지(地里誌) 충주목(忠州牧)에는 1255년(고종 42) 다인철소(多仁鐵所) 사람들이 몽골군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워 소를 익안현(翼安縣)으로 승격시켰으며, 1277년(충렬왕 3) 몽골에서 환도(環刀) 천 자루를 요구하자 조정에서 이를 다인철소에 제조하게 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곡나철산과 다인철소는 충주지역으로 비정되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에는 충주에서 많은 철이 생산되어 정부에 세공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실제 충주지역에는 삼국~조선시대에 해당되는 15개소 이상의 발굴유적과 61개소의 지표조사 유적이 분포한다. 완오리제철유적은 충주에서 가장 먼저 발굴조사된 조선시대 제철유적이다.

내용

충주완오리제철유적은 충주박물관과 국립중앙과학관에 의해 1997년도 학술적 목적으로 발굴조사되었다. 해발 100m 미만의 야트막한 야산 남사면 약 200m 범위의 골짜기 전체가 유적지로, 서쪽 약 260m 거리에는 소하천이 남으로 흘러 약 600m 거리의 요도천에 합수한다.

발굴조사 결과, 제철로 2기와 건물지·석렬 각 1기, 구덩이유구 5기가 조사되었으며, 노 벽체편을 비롯해 철광석·대형 유출재 등의 철재·철괴·철광석·송풍관·쇠망치·철촉·쇠못·주조철기 파편 등의 관련유물이 출토되었다. 1호 노는 땅을 파고 할석을 수직으로 쌓은 다음 안쪽에 진흙을 발라 벽체를 조성하였다. 평면형태는 원형 혹은 모가 죽은 방형에 가까우며, 내경 120㎝ 정도, 두께 15㎝ 이상으로 추정된다. 경사가 낮은 남동쪽 벽면은 삭평되었는데, 배재구(排滓口)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호 노의 북서쪽 5m 거리에는 잘게 부서진 철광석과 광석가루가 밀집분포되어 있는데, 철광석을 파쇄했던 장소로 추정된다.

2호 노는 삭평이 심해 자성을 띠는 경화 소토면만 남아 있지만 유리질화된 노 벽체편과 철광석이 수습되었다. 동쪽 2m 거리에는 숯가루가 분포하고 있었는데, 연료용 목탄을 저장하던 장소로 추정된다. 이처럼 완오리제철유적은 자철광과 적철광을 제련해 괴련철을 생산하던 제철로(製鐵爐)로, 고려시대 이후의 토기류, 청자·분청사기·백자 등의 자기류, 기와류 및 토층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조업이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완오리제철유적 주변에는 다수의 제철유적이 분포한다. 먼저 북쪽 90m 거리에 위치하는 노계마을 제철유적(본리 209-1번지)에서는 제련로로 추정되는 1기의 노와 단야로 2기 및 철재폐기장·건물지 등이 조사되었으며, 단조박편·입상재 등이 출토되었다. 남쪽 100m 거리에는 충주 완오리 산144-2·산144-20번지유적이 위치하는데, 제철로 3기와 폐기장·숯가마 등이 조사되었다. 이 중 평면 타원형의 제련로인 2호 노에는 뒤쪽에 풀무가 놓였던 자리가 있고 이곳에서부터 노로 연결된 송풍관이 노 뒷벽에 박힌 채 남아 있었다.

서쪽 약 550m 거리의 노계마을 고려시대 제철유적(본리 535-10번지 일원)에서는 노적(爐蹟) 1기와 폐기장·추정공방지·숯가마·매납유구 등이 조사되었다. 이 중 매납유구에서는 무쇠솥[鐵釜·鐵鼎]과 보습·볏·주조괭이 등이 출토되었는데, 솥 안에 괭이와 낫, 솥 파편 등의 철기가 가득 채워져 있어 용해주조용 철 소재로 파악되고 있다.

서쪽 약 650m 거리의 노계마을유적(본리 324-1번지)에서는 제련로와 단야로 각 1기와 철재폐기장·숯가마·수혈유구 등이 조사되었고, 송풍관·철광석·숫돌·유출재·단조박편·입상재 등이 출토되었다. 이 유적들은 모두 고려시대에 조업이 이루어졌으며, 가까운 거리에 인접해 위치하는 점으로 보아 동일유적으로 한데 묶어도 될 듯하다. 이 외 동쪽 약 5.5㎞ 거리의 탄금대토성(彈琴臺土城) 수조유구(水槽遺構)에서는 길이 30㎝, 너비 4㎝, 두께 1.5㎝ 크기의 철정(鐵鋌) 40매가 출토된 바 있으며, 지표조사에서도 다수의 고려~조선시대 제철유적이 조사되었다.

특징

충주완오리제철유적의 제련로는 20~25㎝ 크기의 할석을 흙과 함께 쌓고 안쪽에 지푸라기 등을 섞은 진흙을 발라 벽체를 만들었다. 이러한 구조는 점토를 원통형으로 쌓아 올리던 고대의 원통형로와는 다른 구조로, 울산 달천광산 주변 석축형제철로 및 보은 상판유적 등 노 벽체를 보강하는 조선시대 제련로와 상통하는 데가 있다.

의의와 평가

충주완오리제철유적이 위치하는 충주지역은 고대로부터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철을 생산했던 철산지의 하나로, 주변에는 충주 칠금동·본리·완오리 등 삼국-고려-조선시대로 이어지는 다양한 제철로 유적이 조사된 바 있다. 노 벽체 외곽을 석재로 보강해 노의 사용 시기를 늘였다는 점에서 고대의 원통형 제련로와는 구조적·기술적 차이가 있음을 말해주며, 주변지역 제철로와 더불어 노의 시기적 변화상을 잘 보여주는 유적으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충주 완오리 야철유적』(충주박물관·국립중앙과학관, 1998)
「중원지역 제철로의 검토」(김권일,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개소 5주년 기념 학술대회, 2012)
「충주 제철유적의 현황과 성격」(어창선, 『선사와 고대』 35,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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