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숙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산부인과와 소아과 전문 영혜의원과 조산병원인 허영숙산원을 개원한 의사, 기자, 여성운동가.
이칭
개명
가야마 에이코〔香山英子〕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여성
출생 연도
1897년(고종 34)
사망 연도
1975년
출생지
서울
주요 저서
이광수 전집
주요 경력
영혜의원 원장|허영숙산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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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허영숙은 일제강점기 산부인과와 소아과 전문 영혜의원과 조산병원인 허영숙산원을 개원한 의사, 기자, 여성운동가이다. 조선총독부 의사검정시험을 통해 의사 자격을 얻은 후 영혜의원을 개원하고 이광수와 결혼하였다. 이후 허영숙산원을 개원하였으며, 1920~1930년대 언론 기자로 활동하면서 의학적 지식을 알리고 여권 의식 계몽에 앞장섰다.

정의
일제강점기 산부인과와 소아과 전문 영혜의원과 조산병원인 허영숙산원을 개원한 의사, 기자, 여성운동가.
가계 및 인적 사항

허영숙(許英肅)은 1897년(고종 34) 서울에서 태어났다. 상인 출신인 부친 허종(許鐘)의 막내딸이다. 1911년 진명학교 중등과를 거쳐 1914년에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京城女子高等普通學校)를 졸업하였다. 1914년 도쿄〔東京〕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재학 당시인 1917년에 이광수(李光洙)의 폐결핵을 간호하면서 연인이 되었다. 1918년 7월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같은 해 10월 조선총독부에서 시행한 의사검정시험에 합격하였다. 의사 자격을 얻은 후에는 조선총독부의원에서 임상 수련을 1년간 거치면서 산부인과와 소아과를 전문으로 하였고, 함흥에서도 실습을 진행하였다.

1920년 5월 1일 산부인과와 소아과 전문을 표방한 영혜의원(英惠醫院)을 개원하였고, 같은 해 여름 서울에 큰 홍수가 나자 『 동아일보』에서 주관한 수해 구호사업에 방역대의 일원으로 참가하였다. 1921년 5월에 이광수와 정식으로 혼인하였다. 1922년 3월 2일 좀 더 수준 높은 의학 공부를 위해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유학길에 올랐으나 4개월 만에 다시 돌아오기도 하였다.

주요 활동

1920년대 초부터 의식주의 위생과 개량, 일상적 질병에 관한 상식, 가정의 살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과학적 · 의학적 지식을 『동아일보』, 『 조선일보』, 『 매일신보』 등에 게재하였다. 1924년 말부터는 『동아일보』의 정식 기자가 되었고 1925년 12월부터 1927년 3월까지 『동아일보』 학예부장을 맡기도 하였다.

1927년 첫아이를 출산하여 기자 및 의사 활동을 중단하였으나, 1929년 『매일신보』에 「여성에게 필요한 이상적인 가정」이라는 글로 응모하여 당선되기도 하였다. 1934년 2월 첫아이가 패혈증으로 사망하자 의학 공부를 다시 시작하여 세 번째 도쿄 유학을 떠났다. 향후 산원(産院)을 경영할 포부를 가지고 1935년 11월 일본 적십자병원 산원에서 조수로 일하며 박사 논문을 쓰며 학위를 취득하려 하였지만,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으로 이광수의 체포 소식을 듣고 유학 1년 6개월 만인 1937년 6월에 귀국하였다.

1938년 6월 근대식 설비를 갖춘 민간 조산 병원인 허영숙산원(許英肅産院)을 개원하여 당시 많은 여성의 보건과 의료에 헌신하였다. 일제의 전시체제 아래 1941년 10월 매일신보사의 ‘임전(臨戰) 생활 중견 부인 간담회’에 수차례 참석하기도 하였고, 이광수의 창씨개명 이름인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에 따라 가야마 에이코〔香山英子〕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었다.

1944년 남양주 사릉에 남편 이광수의 거처를 마련해 주기도 하였으나, 1946년 5월에 결국 남편과 협의 이혼하였다. 1950년 이광수가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지병으로 사망하자, 1956년 출판사 광영사를 등록하여 1963년 11월 남편의 원고를 모아 『이광수 전집』을 완간하였고, 1975년 「이광수기념비」 건립을 준비하던 중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 사상과 작품

주로 자녀 양육법과 가정위생, 의학 정보와 지식을 제공하는 대중 활동에 활발하였고, 나아가 양성평등을 전제로 한 여성의 사회적 위치와 역할에 관한 글을 남겨 여성 의식 계몽에 앞장섰다. 1925년 8월부터 10월까지 『동아일보』에 「민족 발전에 필요한 어린아희 기르는 법」(총 41회), 「조선여자의 천직」(총 3회) 등을 연재하였고, 여성문제와 관련하여 1926년 1월 초에 「부인 문제의 일면, 남자 할 일 여자 할 일」 등을 게재하였다. 1931년에는 단발을 하고, 1932년 5월 잡지 『 삼천리』에 「여학생이여 단발하라」라는 여학생의 단발을 찬성하는 글을 싣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단행본

하타노 세츠코, 『이광수, 일본을 만나다』(최주한 역, 푸른역사, 2012)
나혜석, 『신여성, 길위에 서다』(서경석 엮음, 호미, 2007)
한국여자의사회, 『한국여자의사90년』(의학출판사, 1986)

논문

황정현, 「허영숙의 글과 사상- 허영숙 연구를 위한 시론」(『춘원연구학보』 16, 2019)
신동원, 「일제강점기 여의사 허영숙의 삶과 의학」(『의사학』 21, 대한의사학회, 2012)
신영숙, 「일제하 한국여성사회사 연구」(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1989)

신문 · 잡지

허영숙, 「여인논단 이런 사람이 없어지소서」(『신여성』 5권 1호, 1931)
「허영숙산원 탐방기」(『여성』, 1938. 12.)
『독립신보』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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