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떡은 원래 페르시아에서 탄생한 음식으로 중국에는 한나라 때 들어왔다. 전래 초기 호떡은 화덕에서 구워 만들었으며 얇고 둥근 빵의 형태였다. 한나라 말기와 삼국시대 때 호떡은 널리 유행하였고, 당나라 때는 황제, 귀족, 승려뿐 아니라 일반 서민도 즐겨 먹는 음식으로 발전하였다. 수도 장안(長安)에는 호떡 전문 가게가 성업했으며, 지역마다 독특한 호떡 제조 방법이 존재하였다. 호떡은 송나라 이후에도 발전을 거듭하여 서민들이 즐겨 찾는 음식으로 정착하였다.
1882년(고종 19)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 체결 이후 중국인의 조선 이주가 본격적으로 이뤄지면서 호떡도 함께 국내에 들어왔다. 1889년(고종 26) 서울에 광동성 출신 화교가 경영하는 호떡집인 푸싱빵집[福星麵包房]이 영업하고 있었으며, 1906년(광무 10)에는 17개, 1923년에는 203개로 증가하였다. 화교의 이주가 빨랐던 서울과 개항장에서 호떡집이 먼저 생겨났고, 1910년대가 되면 조선 각지로 화교 이주가 이뤄지면서 호떡집도 전국적으로 생겨났다.
호떡은 외식이 발달하지 않은 시기에 한국인의 입맛에 맞고 값이 저렴한 음식이어서 서민의 인기를 독차지하였다. 호떡이 대중 음식이 되면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1920년대 호떡과 호떡집을 주제로 한 수필과 단편 소설을 연재하기도 하였다. 1930년 10월 전국의 화교 호떡집은 1,139개에 이르렀다. 화교는 호떡집을 일반적으로 만터우푸[饅頭舖], 일본인은 만주야[饅頭屋]라고 불렀다. 화교 경영의 호떡집은 주로 한국인 거주지에서 영업한 관계로 강도의 표적이 되거나, 호떡을 먹고 돈을 내지 않는 한국인과 화교 주인 간에 실랑이가 자주 벌어졌다. 특히, 1927년과 1931년 발생한 두 차례의 화교 배척 사건 때 화교 호떡집은 가장 큰 피해를 당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중일전쟁 시기에도 호떡의 인기는 식지 않아 순조롭게 판매가 이루어지자 호떡집은 화교의 주요한 사업 수단으로 정착하였다.
화교 호떡집은 1950년대와 1960년대까지 성업을 이어갔으며, 1963년에는 약 500여 개의 호떡집이 서울, 인천, 군산, 부산, 대구, 목포 등의 대도시에서 영업하였다. 1970년대 들어 호빵이 등장하여 크게 유행하면서 호떡의 인기는 시들해졌다. 여기에다 호떡집은 화덕을 사용해 각종 호떡을 조리하는 관계로 당국의 환경 규제가 강화되자 영업이 곤란해 문을 닫는 곳이 많아졌다. 화교 호떡집은 1970년대 들어 급감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인천 차이나타운의 복래춘(復來春), 서울 북창동의 융태행(隆泰行) 등이 대를 이어가면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길거리에서 판매되는 호떡은 화교들에 의해서 도입된 호떡을 한국식으로 변형하여 만든 것이다. 중화권에서는 한국식 호떡을 흑설탕병(黑糖餠)으로 구분하여 부른다. ‘호떡’의 소는 보통 계피 맛이 나는 흑설탕을 넣지만 야채, 땅콩, 견과류 등을 넣기도 한다.
호떡집에서 판매하는 호떡의 종류는 다양하다. 둥글넓적한 밀가루 반죽에 흑설탕을 넣은 호떡을 당화소(糖火燒)라 불렀는데. 이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호떡’이다. 계란빵[鷄蛋餠]은 빵 안쪽에 계란 흰자와 팥을 넣고 겉쪽에 계란 노른자를 발라 구워냈다. 참깨빵[芝麻餠]은 속에 팥고물을 넣고 겉에 참깨를 묻혔다. 만터우[饅頭]는 소를 넣지 않은 찐빵, 바오즈[包子]는 소를 넣어 만든 찐빵이다. 인천 차이나타운의 명물로 화덕에서 구워낸 공갈빵, 더우장[豆漿]과 함께 먹는 꽈배기인 여우탸오[油條] 또한 호떡의 일종이다.
호떡은 화교의 세시 풍속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호떡집은 원소절(元宵節)에 찹쌀떡탕[湯圓], 단오절(端午節)에 쫑쯔, 중추절(仲秋節)에 월병을 만들어 판매하였다. 화교 가정은 백일이나 돌 때는 만터우라고 하는 찐빵을 만들어 하객들과 나눠 먹었다. 찐빵은 장수를 뜻하는 복숭아와 석류 모양으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