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모으기운동 (모으기)

경제
사건
1997년, IMF 외환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금을 모아서 외채를 상환하려고 한 국민적인 운동.
이칭
이칭
제2의 국채보상운동, 신(新)국채보상운동
사건/사회운동
발생 시기
1997년 12월 ~ 1998년 1월
종결 시기
1998년 4월
발생 장소
대한민국 전역
관련 국가
대한민국
관련 단체
소비자보호단체협의회, 외채상환 금모으기 범국민운동본부
관련 인물
김대중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금모으기운동은 1997년 IMF 외환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금을 모아서 외채를 상환하려고 한 국민적인 운동이다. 금모으기운동은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 외환을 상환할 수 없게 되어 IMF 구제금융을 받게 되자,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금을 모아 수출하여 이를 상환하자는 전국민적인 캠페인으로 1998년 1월부터 그해 4월까지 진행한 국민적인 캠페인이다.

정의
1997년, IMF 외환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금을 모아서 외채를 상환하려고 한 국민적인 운동.
발단

1997년 7월 태국을 시작으로 동아시아 금융위기가 시작되면서 한국 역시 원화 방어에 외환보유고를 지나치게 소진하게 되어 외채를 상환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97년 11월 21일에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게 되고, 이로 인한 외채를 상환하기 위하여 ‘1달러 모으기 운동’, ‘월수입 5% 저축 국민운동’ 등의 캠페인이 제안되기도 하였는데, 그러한 캠페인 중에서 가장 큰 국민적 호응을 이끌어 낸 것이 금모으기운동이다. 이러한 금모으기운동은 1997년 12월 1일부터 ‘애국가락지 모으기 운동’을 새마을부녀회에서 제안한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경과 및 결과

그러나 이와 같은 금모으기운동은 초기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9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가 소비자 단체장들에게 ‘금모으기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에 소비자 단체 등은 정부의 협조 등을 받고 ‘외채상환 금모으기 범국민운동본부’ 발족을 위한 준비위원회를 42개 단체를 중심으로 구성하여 1998년 1월 12일 발대식을 갖고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한다. 당시 사무국은 소비자보호단체협의회가 담당하였고, 범국민운동이라는 취지에 따라 운동에 참여하기 원하는 모든 기관이 참여하는 것으로 결정되어 전국민적인 캠페인으로 진행되게 된다. 한편, 이러한 움직임 이전에 1997년 2월 국채보상운동 90주년을 맞이하여 대구광역시와 경제 단체 등은 제2의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기하였다. 이런 두 가지의 흐름이 IMF 외환위기 시기를 경과하면서 국난의 극복과 외채라는 기억이 환기되는 과정을 통하여 금모으기운동은 제2의 국채보상운동 혹은 신(新)국채보상운동으로 호명되기도 했다.

KBS ‘금모으기 캠페인’ 방송을 1998년 1월 5일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운동이 시작되었고, 금모으기운동에 참여하는 개인 등은 금반지 등을 가지고 오면 감정사가 이를 감정하고, 수출 후 달러를 환율과 국제 금 시세로 평가해 나중에 원화로 돌려받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높은 호응도를 바탕으로 진행되어 공식적으로는 3월 14일에 종료되었으나, 이후에도 4월까지 농협중앙회가 진행하여 최종적으로 정리가 되었다. 이러한 금모으기운동을 통해서 걷힌 금은 약 227톤이며, 전국적으로 3백 51만 명이 참여하였다. 걷힌 금은 대부분 팔렸으며 수출액은 약 22억 달러 정도였다. 당시 실시한 설문조사를 보면 각계에서 경제살리기운동 및 개혁 조치에 대해 큰 효과를 거둘 것인가에 대해서 기업 구조 조정이 77.3%로 가장 높았다. 그 다음으로 금모으기운동(74.2%)이 높았던 것으로 나타났고, 금모으기운동에 대한 국민의 참여율 역시 10명 중에서 3명이 참여할 만큼 호응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외채를 갚자는 애초의 의도와는 달리 국제 시세보다 낮은 헐값에 외국인에게 팔렸다거나 금 제련의 상당 작업이 해외 업체를 통해 이루어지면서 제련에 따른 부가 가치가 해외로 넘어가는 등의 부작용도 발생하였다.

의의 및 평가

금모으기운동은 제2의 국채보상운동이라고 불리었을 만큼 많은 국가적 재난을 맞이하여 국민들의 많은 참여와 호응 속에서 이루어진 자발적인 국민 캠페인이었다. 그 과정에서 국채보상운동을 환기시키면서 추가적인 국민적 결집을 이루어낸 운동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참고문헌

논문

박건, 「집합기억의 사회적 구성에 관한 연구_국채보상운동과 금모으기 운동을 중심으로」 (『문화와 사회』 2, 한국문화사회학회, 2007)

기타 자료

‘아기 돌반지로 경제를 살립시다-새마을부녀회 애국 가락지 모으기 운동’, 『중아일보』 (1997.12.4.)
‘본전도 못건진 금모으기 운동’, 『한겨레 21』 (1988.5.11.)
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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