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철(羅喆)
그러나 서창보(徐彰輔) 등이 붙잡히고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자, 동지들의 고문을 덜어 주기 위해 오기호, 최인식(崔寅植) 등과 함께 평리원(平理院)에 자수하여 10년의 유배형을 받았다. 고종의 특사로 그 해에 풀려나서 1908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외교적인 통로에 의한 구국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소득 없이 귀국하였다. 교단에 전하는 말로는 일본에 체류할 때 두일백(杜一白)이라는 도인이 찾아와서 단군교를 포교하는 일을 사명으로 여기라는 가르침을 주었다고 한다. 이후 귀국하자마자 오기호, 강우(姜虞), 유근(柳瑾), 정훈모(鄭薰模), 이기, 김인식, 김춘식(金春植) 등의 동지들과 함께 서울 재동에서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거행한 뒤 단군교를 공표하였다. 이 날이 바로 중광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