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언심(彦深). 강회중(姜淮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강안복(姜安福), 아버지는 강이행(姜利行), 어머니는 허손(許蓀)의 딸이다.
1486(성종 17) 진사시에 합격하고, 1494년(성종 2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해에 승문원권지(承文院權知)로 보임되고, 다시 예문관검열 · 홍문관저작이 되었으며, 이어서 부수찬 등을 거쳐 부응교로 승진되었다.
연산군 때 경연관(經筵官)으로 8년 동안 재직했다. 강학시 말이 유창하고 뜻이 깊어 좌우 신하들이 모두 경청하였다.
경연관으로 있을 때 충청도에 있는 요승(妖僧)이 스스로 사람들의 마비된 수족을 요술로 고친다 하면서 백성들을 현혹하므로, 왕명에 따라 그 요승을 문초해 요망스러운 실정을 밝힌 바 있다.
돌아와서 장령이 되었다가 다시 직제학 · 부제학 등을 거쳐 좌부승지가 되었다. 1504년(연산군 10) 왕에게 수렵을 삼가도록 간했다가,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서 낙안(樂安)에 유배되기도 했다.
1506년 유배지에서 복세암(福世庵)을 뜯어옮기는 것을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잡혀와 옥에 갇혔다. 그러나 그 해 발생한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서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1508년 동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성절사(聖節使)로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부모 봉양을 위해 전주부윤을 자청해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1521년(중종 16)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갔을 때 뛰어난 글씨 솜씨로 황제의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돌아와서 지중추부사 · 경주부윤을 거쳐 예조참판이 되었다. 글씨를 잘 써서 중종의 총애를 받았다. 중종은 그에게 옛 명현들의 명언과 시문을 쓰게 했고, 이를 홍문관에 걸어놓고 선비들과 백관들의 처신의 기준으로 삼도록 했다. 필법은 당대에 으뜸이었다고 한다. 글씨로는 「정익혜공난종신도비(鄭翼惠公蘭宗神道碑)」 · 「예조참의최한정비(禮曹參議崔漢楨碑)」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