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항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중기에, 교서관박사, 공조좌랑, 형조좌랑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태초(太初)
수은(睡隱), 사숙재(私淑齋)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67년(명종 22)
사망 연도
1618년(광해군 10)
본관
진주(晉州).
출생지
영광
주요 저서
운제록(雲堤錄)|강감회요(綱鑑會要)|좌씨정화(左氏精華)|간양록(看羊錄)|문선찬주(文選纂註)|수은집(睡隱集)
주요 관직
형조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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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중기에, 교서관박사, 공조좌랑, 형조좌랑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태초(太初), 호는 수은(睡隱). 영광 출신. 좌찬성 강희맹(姜希孟)의 6세손으로, 할아버지는 강오복(姜五福), 아버지는 강극검(姜克儉), 어머니는 통덕랑(通德郞) 김효손(金孝孫)의 딸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93년 전주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교서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가주서를 거쳐 1595년 교서관박사가 되고, 1596년 공조좌랑과 이어 형조좌랑을 역임했다.

1597년 고향에 내려와 있던 중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분호조참판 이광정(李光庭)의 종사관으로 군량미 수송의 임무를 맡았다. 아군의 전세가 불리해져 남원이 함락당하자 고향으로 내려와 순찰사 종사관 김상준(金尙寯)과 함께 격문을 돌려 의병 수백 인을 모았다.

영광이 함락되자 가족들을 거느리고 해로로 탈출하고자 했다. 그러나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압송, 오쓰성[大津城]에 유폐되고 말았다. 이곳에서 출석사(出石寺)의 중 요시히도[好仁]와 친교를 맺고 그로부터 일본의 역사 · 지리 · 관제 등을 알아내어 『적중견문록(賊中見聞錄)』에 수록, 본국으로 보내기도 했다.

1598년 오사카[大阪]를 거쳐 교토[京都]의 후시미성[伏見城]으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후지와라[藤原惺窩] · 아카마쓰[赤松廣通] 등과 교유하며 그들에게 학문적 영향을 주었다.

특히, 후지와라는 두뇌가 총명하고 고문(古文)을 다룰 줄 알아 우리 나라의 과거 절차 및 춘추석전(春秋釋奠) · 경연조저(經筵朝著) · 공자묘(孔子廟) 등을 묻기도 하고, 또 상례 · 제례 · 복제 등을 배워 그대로 실행, 뒤에 일본 주자학의 개조가 되었다.

일본 억류 중 두 사람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으며, 또한 그들의 노력으로 1600년에 포로 생활에서 풀려나 가족들과 함께 귀국할 수 있었다.

1602년 대구교수(大邱敎授)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죄인이라 하여 곧 사직했으며, 1608년 순천교수(順天敎授)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부임하지 않았다. 그리고 향리에서 독서와 후학 양성에만 전념, 윤순거(尹舜擧) 등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일본 억류 중 사서오경의 화훈본(和訓本) 간행에 참여해 몸소 발문을 썼고, 『곡례전경(曲禮全經)』 · 『소학(小學)』 · 『근사록(近思錄)』 · 『근사속록(近思續錄)』 · 『근사별록(近思別錄)』 · 『통서(通書)』 · 『정몽(正蒙)』 등 16종을 수록한 『강항휘초(姜沆彙抄)』를 남겼으며, 이들은 모두 일본의 내각문고(內閣文庫)에 소장되어 있다.

그밖에 「문장달덕록(文章達德錄)」과 동양문고 소장본 『역대명의전략(歷代名醫傳略)』의 서문을 썼다. 1882년(고종 19)에 이조판서양관대제학(吏曹判書兩館大提學)이 추증되었다.

영광의 용계사(龍溪祠) · 내산서원(內山書院)에 제향되고, 일본의 효고현[兵庫縣]에 있는 류노[龍野]성주아카마쓰[赤松廣通]기념비에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저서로는 『운제록(雲堤錄)』 · 『강감회요(綱鑑會要)』 · 『좌씨정화(左氏精華)』 · 『간양록(看羊錄)』 · 『문선찬주(文選纂註)』 · 『수은집(睡隱集)』 등이 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수은집(睡隱集)』
『동토집(童土集)』
『간양록(看羊錄)』
Transmission of Neo-Confucianism to Japan by Kang Hang, Prisoner of War(Ha Tai Kim, 『백낙준박사회갑기념국학논총』, 1955)
『日本朱子學と朝鮮』(阿部吉雄, 日本東京大學出版會,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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