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개성(開城). 자는 사물(思勿), 호는 태촌(泰村). 할아버지는 충순위증판결사 고극공(高克恭)이며, 아버지는 증 한성우윤 고천우(高天佑)다. 어머니는 신천 강씨(信川康氏) 습독 강희언(康希彦)의 딸이다.
1573년(선조 6) 진사가 되고, 1576년(선조 9)에 문과에 올라 함창현감 · 풍기군수 등을 지냈다. 40세 되던 해인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침입하자, 향리인 상주 함창에서 의병 대장으로 추대되어 큰 공을 세웠다.
49세인 1601년(선조 34) 이후지례현감 · 함양군수를 지냈고, 이덕형(李德馨) · 이순신(李舜臣) 등과의 서사 기록(書事記錄)도 남긴 바 있다. 그 뒤 울산판관을 지낸 후, 벼슬을 그만두고 전원 생활을 하였다.
문집으로 1898년(고종 15)에 간행한 목판본 6권 3책이 전한다. 그 가운데 행장(行狀)에 보면 농사에 밝고 문장이 능하며, 농군을 가르치고 농사에 관한 저술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하여 학계에서는 현전하는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를 그의 작품이라 추측하고 있다.
이는 문집인 『태촌집(泰村集)』에 「농가월령」이라는 기록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벼슬에서 물러난 이후 농경 생활을 했다는 내용이 문집의 행장에 기록되어있어, 「농가월령가」는 고상안과 관련이 깊으리라는 짐작에서 연유된 것이다.
그 밖에 그의 문집에는 총화(叢話) · 여화(餘話)에 해당되는 「효빈잡기(効嬪雜記)」를 비롯하여, 임진왜란 때 유성룡(柳成龍)에게 올린 팔책(八策)과 유합(類合), 『해동운부군옥(海東韻府群玉)』에 대한 기록과 풍속 · 전설에 관한 기록 등이 전해지고 있어 일반 문집에 비해 이색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점을 종합하여 볼 때, 「농가월령가」의 나타난 계절 감각, 영농 내용 등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는 까닭에, 학계에서는 그가 「농가월령가」의 작자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문집으로 『태촌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