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7월 5일 서울 태서관(太西館)에서 이인(李仁)·김용관(金容瓘)·김창제(金昶濟)·박길룡(朴吉龍) 등 발명학회 간부들과 서울시내 중등학교 교사 등 100여 명을 발기인으로 해서 창설되었다.
‘과학의 생활화’를 강령으로 내세운 이 단체는 회장에 윤치호(尹致昊), 부회장에 이인, 이사에 박준호(朴準鎬)·김용관·유억겸(兪億兼), 간사에 정인관(鄭寅寬), 보급위원에 이훈구(李勳求)·최규동(崔奎東)·현상윤(玄相允)·윤일선(尹日善)·이하윤(異河潤)·이헌구(李軒求)·주요한(朱耀翰), 연구위원에 이극로(李克魯)·이춘호(李春昊)·안동혁(安東赫)·이만규(李萬珪)·이채호(李采鎬)·조복성(趙福成)·최윤식(崔允植), 재정위원에 신태악(辛泰嶽)·오윤선(吳胤善)·박흥식(朴興植) 등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망라하여 임원진을 구성하였고, 평양·원산·신천·김천 등을 포함한 전국적인 지부를 구성하여 과학대중화사업을 전개하였다.
이 단체의 가장 중요한 사업의 하나는 해마다 다윈(Darwin,C.R.)이 죽은 날인 4월 19일로 정한 ‘과학의 날’과 이날을 전후한 과학주간 행사로, 이 행사는 전국 주요 도시에서 기념식과 강연회를 개최하는 한편, 일반인들에게 과학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해 과학영화를 상영하고, 과학관과 공장 견학을 주선하였다.
또 과학도서의 편찬과 발간, 각급 학교의 자연과학교과에 관한 조사, 과학대중화방법에 관한 조사, 과학 표본의 제작·판매·취급대리, 과학종합지인 ≪과학조선≫ 발행 등의 사업을 전개하였다.
이 단체가 주관한 과학대중화운동은 ≪동아일보≫·≪조선일보≫·≪조선중앙일보≫ 등 민족지의 적극적인 지원과 각계의 거족적인 호응을 얻으면서 차차 민족운동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에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이 단체에 탄압을 가하기 시작하여, 1938년 제5회 과학의 날 행사에서 이 운동을 주도한 실무책임자 김용관을 체포·투옥함으로써 점차 쇠락하였고, 1930년대 말에는 그 명칭도 과학보급협회로 바뀌어 과학의 날에도 소규모의 견학단을 조직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러나 과학기술 진흥을 통한 민족 저력의 축적이라는 목표를 내건 이 운동은 구체적으로 국민 일반의 과학에 대한 관심을 크게 진작시켜, 1935년 국내에서 일대 발명 붐이 일었으며, 특허와 실용신안 출원이나 등록 건수가 이 운동 이전보다 5배나 급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