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료제도 ()

사회구조
제도
합리성을 이념으로 조직된 대규모의 분업체제 내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조직형태 또는 특정의 지배적 사회계층을 토대로 형성된 관리집단이 공리의 추구를 위해 조직한 행정조직.
정의
합리성을 이념으로 조직된 대규모의 분업체제 내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조직형태 또는 특정의 지배적 사회계층을 토대로 형성된 관리집단이 공리의 추구를 위해 조직한 행정조직.
개설

앞의 정의는 관료제를 구조적인 측면에서 넓은 뜻으로 규정한 것으로, 행정관료제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사기업·노동조합·군대 등을 포함하는 모든 대규모조직을 다 함께 지칭하고 있다. 이와 같은 대규모조직의 구조·기능상의 특징을 사회과학계에서는 ‘관료제적’이라고 표현한다.

한편 뒤의 정의는 정치권력적 측면에서 정부관료제만을 지칭한 것이다. 즉, 하나의 거대한 권력기구로서, 관료집단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통치구조를 가리킨다.

관료제도의 성격과 유형

관료제란 이처럼 매우 다의적인 개념일 뿐만 아니라, 시대적 및 사회적 환경에 따라 그 존재형태를 달리하고 있기 때문에, 그 특징을 명확히 규정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학계에서 어느 정도 합의되고 있는 관료제의 기본적 특성은 다음과 같다.

① 모든 직위의 권한과 관할의 범위가 법규에 의하여 규정된다. 권한은 직위에 부여되며, 사람은 직위를 맡음으로써 권한을 행사하게 된다.

② 모든 직위는 권한의 계층이 뚜렷하게 구별되는 계서제(階序制) 속에 배치된다. 계서제는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질서정연한 체제이다.

③ 모든 직위의 권한과 임무는 문서화된 법규에 의하여 규정된다.

④ 관료는 지배자의 개인적 종복으로서가 아니라 법규로 정한 직위의 담당자로서, 임무수행에 관한 법규의 적용에 있어서 공평무사한 비개인성(非個人性)을 유지해야 한다.

⑤ 임무수행에 필요한 전문적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관료로 채용된다. 채용의 기준은 전문적 능력이며, 관료로서의 직업은 잠정적인 직업이 아니라 일생 동안 종사하는 전임직업이다. 한편, 관료는 계급과 근무연한에 따라 고정된 보수와 연금을 받게 되며, 승진기회가 제공되는 것이 보통인데, 승진의 기준은 주로 선임순위(先任順位)이다.

⑥ 관료제가 성숙하면 그것은 거의 파괴할 수 없는 항구적 실체로 등장한다. 권력관계의 사회화를 통해 권력의 망을 형성하며, 사회의 적절한 기능수행을 위해 요긴한 용역을 제공함으로써 관료제는 스스로를 항구화한다.

관료제의 전문적 능력이나 비개인적 특성도 관료제의 항구화에 기여하는 요인이다. 또한 관료제에 대한 외부세력의 의존도를 높이기 위해,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비밀주의에 입각하여 스스로를 보호한다.

이와 같은 일반적 특징을 지닌 관료제는 여러 가지 종류 또는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민간 부문의 관료제와 정부 부문의 관료제로 구분할 수 있는데, 후자를 흔히 ‘정부관료제’라고 부른다.

또한 옛날 중국의 유교적 관료제와 같은 후견적 관료제(後見的官僚制), 신분 또는 계급관료제, 정실관료제, 그리고 실적관료제 등과 같이 역사적 등장순서에 따라 그 유형을 나눌 수도 있다. 또는 가산관료제(家産官僚制)·위광적 관료제(威光的官僚制), 그리고 법적·합리적 관료제로 나누기도 한다.

때로는 인사제도의 특성에 따라 관료제를 엽관(獵官)체제·실적체제·복지체제, 그리고 긍정적체제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정치적 임용체제·일반실적체제·전문직업인체제·단체협약체제 등으로 나눌 수도 있다.

조직 내의 비공식적 관계를 중시하는 사람은 유명무실한 관료제, 처벌중심의 관료제, 그리고 참여형관료제 등으로 성격을 구분짓기도 한다.

여기서 유명무실한 관료제(mack bureaucracy)란 전통적 관료제의 특성을 공식적으로는 채택하고 있으나 조직구성원들이 실제로 그것을 무시하고 있는 관료제를 말한다. 이러한 관료제에서는 공식적 법규가 잘 지켜지지 않는다.

처벌중심의 관료제(punishment-centered bureaucracy)란 공식적 법규를 무시하고 그에 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해 처벌에 의존하는 관료제를 말한다. 참여형 관료제(representative bureaucracy)란 비공식적 집단이 공식적 법규 입안에 참여하고 그 집행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관료제를 말한다.

전통시대 관료제도의 변천

우리 나라에서 관료제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오래 전의 일이다. 국가의 형태가 나타나면서부터 관료제, 즉 정부관료제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대규모의 정부관료조직이 형성된 것은 삼국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는 시조 동명성왕으로부터 제5대 모본왕(慕本王)에 이르기까지는 부족연맹체제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태조왕 때부터는 고대국가체제를 갖추어 부족장 중심의 정치에서 점차 왕을 중심으로 한 일원적 관제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즉, 그때부터 왕의 칭호가 ‘태조대왕(太祖大王)’ 또는 ‘국조왕(國祖王)’으로 되었고, 패자(沛者)·대로(對盧)·주부(注簿) 등의 관직명을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5부족제가 붕괴되고 5부행정제도가 실시됨으로써 부족연맹장으로서의 왕권이 안정되어 고대적 왕권관제체제가 확립되어 갔다.

백제는 고구려와 같은 부족연맹조직에 대한 기반이 없이, 온조왕이 유이민(流移民)을 거느리고 남하하여 세운 전제왕국이다. 따라서 백제의 관제는 전제왕국의 통치체제를 갖추었을 뿐 아니라, 중국의 관제를 모방한 것이 그 특징이다. 6좌평 16등급(六佐平十六等級)을 두고 복제를 마련하는 한편, 지방행정은 군현제(郡縣制)가 싹트는 계기가 되었다.

신라는 삼국간의 항쟁과 통일과정에서 고대국가로 성장, 발달하였다. 신라의 정치조직도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다원적인 족장세력 및 부족조직을 왕 중심으로 일원화하면서, 귀족화·관료화된 관등체계로 편제되었다.

그 내용은 골품제도를 기반으로 하여 이벌찬(伊伐飡) 등 17등관제로 구성된 것으로서, 골품원리에 따라 관계가 주어지고, 관계에 따라 일정한 관직에 임명될 수 있었다. 삼국통일과정을 거치면서 성골에서 진골로 신구세력의 교체가 이루어지게 되었고, 동양적 국가지배체제의 기본형태인 6전체제와 비슷한 내용의 관제가 갖추어졌다.

또한 내성(內省) 및 왕실의 주요 경제기반인 각시(各寺)·성전(成典)이 설립되었고, 그 관리·감독기구로서 좌우이방부·사정부 및 외사정(外司正) 등이 강화되었다. 한편 신라의 지방행정제도는 이례적인 군현제도로서 주(州)·군(郡)·현(縣) 사이에 하등의 지휘·격차 없이 병렬적으로 직접 중앙정부의 지휘·감독을 받았다.

이처럼 고대사회의 국가관료제는 합리성을 이념으로 하는 근대적인 관료제와는 거리가 멀다. 이것은 군주제하의 관료제로서, 가산관료제의 특성을 많이 지닌다. 즉, 관료제 내의 권한배분이 법령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지배자인 군주에 의해 좌우되며, 관료들은 군주의 종복으로서 군주에 충성을 다하여 복종해야만 했다.

또한 이 시대의 관료제는 계급관료제, 또는 세습관료제라고 할 수 있다. 관직의 품계가 골품이나 혈통에 의해 엄격히 규정되고, 관리의 임용은 폐쇄적인 세습원리에 입각하여 행해졌다. 이러한 가산관료제적·세습관료제적 성격은 고려 및 조선시대의 관료제에서도 계속 나타난다.

고려시대에는 성종 때에 이르러 중국식으로 관제를 일원화하고 새로운 편제를 갖춤으로써 삼국시대와는 다른 관료체제를 형성하였다. 건국 이후, 개국공신들 가운데 무인들의 세력이 강해지자 그들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문치주의(文治主義)를 새로운 정치기준으로 제시하였다. 그 결과 새로운 문인귀족의 세력을 등장시켰으며, 그들에 의한 새로운 귀족관료정치를 실현하게 된 것이 고려관료제도의 특징이다.

고려의 국가체제와 관제가 확립된 것은 제6대 성종에 이르러서이다. 성종은 그 당시 불교나 풍수지리적 사상기반에서 탈피하여 보다 실용적인 유교적 논리를 주체적으로 활용하여 국리와 민복에 입각한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건설하고자 했다.

따라서 최승로(崔承老)와 같은 유신(儒臣)을 중용하여 유교로서 국가의 지도원리를 삼고, 제도면에서는 송(宋)과 당의 것을 거의 그대로 모방하였다. 그리하여 중앙에는 성(省)·부(部)·대(臺)·원(院)·시(寺)·사(司)·관(館)·국(局)을 두었으며, 지방에는 목(牧)·부(府)·주(州)·현(縣)을 두었다.

한편 관리임용에서는 주로 과거제도에 의한 자격임용주의를 원칙으로 채택하였다. 즉, 통일신라의 사회구조는 골품제가 그 기본을 이루었기 때문에, 인재등용에서도 그들의 골품을 뛰어넘을 수 없었으나, 938년(광종 9) 당제를 도입한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관료제도에 큰 변혁을 가져왔다.

그 동기는 광종이 왕권을 강화하고 관료체제를 확립하여 개국공신세력을 합리적으로 도태시킴과 동시에, 과거를 통해 신하는 군주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유교적 윤리사상에 투철한 신진인물을 발탁함으로써 왕권의 확립과 정국의 안정을 이룩하고자 한 것이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동반과 서반의 양반제도가 엄격하였다. 동반은 문관으로 정치를 담당하며, 서반은 무관으로 군사를 담당하였다. 이러한 양반제도가 생긴 것은 975년(성종 14) 문무의 관계를 제정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양반은 직능상 구분되었을 뿐, 법제상으로는 하등의 차별이 없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문반이 무반보다 신분적으로 우월하였다. 문반은 대개 명문출신인 데 비해서 무반은 서민출신의 군졸에서 기용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문관은 과거를 통해 등용되나 무관은 제도상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신이라고 해서 모두가 과거를 거친 것은 아니었다. 유일(遺逸:등용되지 않아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사람)의 추천, 문음(門蔭:공신의 자손이나 왕실의 친·인척이 특별한 연줄로 벼슬을 얻는 일)의 임용, 성중애마(成衆愛馬:같은 官署에 수십 명씩 집단을 이뤄 소속돼 있던 하급관리)의 선보(選補), 또는 사심관제(事審官制:서울에 있으면서 고향의 일에 참섭하던 벼슬아치를 사심관이라 함)와 기인제(其人制:기인이란 지방 호족의 자제로서 중앙에 볼모로 와서 출신지방의 행정에 고문 구실을 하던 사람임) 등 특별임용제가 병행되었다. 이는 고려관료체제의 귀족제적인 특성을 잘 말해주는 것이다.

고려시대의 정부관료제는 가산관료제적·세습관료제적 성격을 구조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온존시키면서 점차 실적관료제적·정실관료제적인 요소를 가미시키고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 관료들은 군주의 종복으로서 군주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이 이전시대보다 훨씬 강조되었다.

관료의 임용에서는 여전히 귀족의 자손이나 관료의 자손에게 관직 취임의 혜택이 먼저 주어졌고, 업무에 대한 전문지식보다는 일반교양을 더 중요시하였다.

조선시대의 관료체제는 건국 초에는 고려 말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다가, 1400년(정종 2)에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의정부로, 중추원을 삼군부(三軍府)로 개편하여 정무와 군무를 분리시키는 제1차 관제개혁이 있었다.

1401년(태종 1)에는 문하부가 의정부와 사간원으로 분화되는 제2차 관제개혁이 있었고, 1405년에는 3사의 기능이 호조로 이관되고, 의정부를 국가최고의 정무기관으로 하는 한편, 6조의 권한을 확대, 강화하는 제3차 관제개혁이 있었다.

뒤이어 세종 때 군현제의 정비, 과거제도 개혁, 문무산계(文武散階)의 완성 등을 통해서 의정부를 정점으로 하고 6조를 기축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실적주의관료제가 정착하게 된다. 이후 세조를 거쳐 ≪경국대전≫의 완성으로 그 구조와 기능면에서, 왕권과 신권 사이에 권력의 조화가 배려된 중앙집권적 관인지배체제가 완성되었다.

이렇게 확립된 관료제도는 1894년 갑오경장에 의한 관제개혁 때까지 큰 변동없이 계속된다. 조선시대 관료제도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권력이 미분화된 전제국가적 관료체제라는 것이다. 국정의 최고정무기관인 의정부와 그에 소속된 육조는 행정은 물론 입법·사법의 사무까지 관장하였으며, 또한 지방의 관찰사와 수령 등도 마찬가지로 행정과 사법을 겸하였다.

② 관료의 상하계급관계가 엄격히 규정, 제한되어 있었다. 또한 관료들의 승진에는 여러 가지 신분상의 제약이 있었는데, 이는 양반사회의 신분질서를 유지하고 고급관료층의 수적 증가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소수의 고급관료들이 몇 개의 관직을 겸직할 수 있는 것이 상례였기 때문에, 결국 정치권력이 소수의 지배층에 집중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③ 비로소 중앙과 지방 사이에 완전한 지휘감독체제가 확립된다. 지방에도 군현제도가 확립되고, 관찰사와 수령간에 지휘감독체제를 유지하는 한편, 중앙정부·관찰사·수령간의 수직적 지휘감독체제도 완성된다.

④ 정치체제는 전제군주체제였으나 실제 운용에는 왕권을 견제하는 세력이 많아 국왕의 독재는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즉, 관인지배적 통치체제를 법전으로 제도화하여 독자적인 헌장법전에 의거한 법치국가를 구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전제군주체제라고는 하나, 국왕의 지위는 정치제도와 기능면에서 적지않게 제한된 위치에 있었다. 전반적으로 정부관료제는 소수의 중앙고급관료에 의하여 정치권력이 장악된 계급관료제라고 할 수 있다.

갑오경장과 을미개혁은 전통적인 관료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의정부 관제를 혁파하고 근대법치국가의 내각제도를 도입한 것, 국가의 재정을 일원화한 것, 공무원임용을 근대화한 것 등이다. 이와 같은 개혁내용의 대부분은 일제의 식민통치관료제로 이어지게 된다.

일제는 강점 직후 대한제국의 정부기구를 본떠서 조선총독부관제를 제정하였으나, 1919년 이후 이른바 ‘문화정치’시대에는 일본의 각성제도(各省制度)를 본떠서 조선총독부관제를 개정하였다. 당시의 관제개편은 일제의 경제적 착취를 비롯한 인적·물적 동원체제에 유리하도록 짜여진 것이므로, 그 자체가 한국의 고유한 조건에 맞지 않았다.

또한 관료제도는 식민지 통치를 위한 기구에 불과하였으므로, 행정제도에 안정성을 기하지 못하고, 그들 통치에 편리하도록 수시로 개정되었다.

일제의 식민관료지배가 한국관료제에 입힌 상처로는 ① 일인에 의한 직접통치방식을 채택하였기 때문에 한민족의 자치능력과 근대적 관리를 배양할 기회를 박탈하여, 그만큼 근대화를 지체시켰다는 점,

② 총독을 정점으로 하는 관료조직의 절대·전제주의적 성격이 관료의 권위주의행태, 관존민비의식, 우민관(愚民觀)에 뿌리박은 관직사유관(官職私有觀), 권력남용, 무사안일주의 등의 폐해를 남겼다는 점,

③ 행정의 합법성만을 강조하여 합목적성이 간과된 법규만능주의적 폐습을 남기고, 전통적인 특별권력관계에 입각한 과잉충성·면종복배(面從腹背) 등의 폐해를 조장하였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근대적 관료제도의 성립과 발전

근대적 의미의 관료제가 형성된 것은 1948년 정부수립 이후의 일이다. 먼저 정부 부문에서 발전된 관료제를 살펴보면, 제1공화국의 관료제는 내각책임제적 요소를 가미한 대통령중심제의 정부형태였다.

이것은 외국제도의 겉모습을 본떠서 채용한 것으로 우리의 고유한 환경과 조화되지 못하였고, 따라서 시행착오가 거듭되었다. 또한 행정권한이 대통령에게 집중되어 전통적 특별권력관계를 만들어내는 등, 상당한 기간 정실체제 내지 엽관(獵官:야심있는 사람들이 벼슬을 차지하려고 경쟁을 벌이는 일) 체제적 요소에 의해 근대적 관료제가 제대로 기능할 수 없었다.

이는 새로운 통치체제가 이전의 식민관료제의 부정적인 요소를 척결하지 못한 채, 오히려 그것을 기반으로 성립함으로써 비롯된 것이다. 그 뒤 4·19혁명·5·16군사정변 등과 더불어 제2공화국·제3공화국을 거치면서, 실적체제의 확립을 위한 오랜 노력 끝에 그 기초를 다지는 데 성공하였다.

제2공화국의 관료제는 제1공화국의 독재체제에 대한 반작용으로 기본권과 정치참여를 최대한 보장하고 합의제기구를 통치기구에 편제하였으나, 전통적인 권위주의적 정치문화와 어울리지 못하고 시행착오를 거듭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관료제는 발전지향과 관리지향으로 우리 나라 관료제의 체질을 개혁하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한편 제3공화국의 관료제는 제2공화국과는 대조적으로 정치참여를 제한하고, 강력한 대통령중심제를 구축하면서 행정의 능률을 앞세워 고도로 집권적인 관료제를 강화하였다.

1973년부터 시작된 유신체제하의 정부관료제는 독재적인 통치지도자의 강력한 행동수단으로 변질되었다. 유신시대의 정부관료제는 총화(總和)의 정치와 집권적·권위주의적 행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국정능률의 극대화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서정쇄신이라는 행정개혁운동이 강력하게 추진되기도 하였으나 도덕적 기반을 결여한 유신체제하의 정부관료제는 심각한 한계와 제약을 안고 있었다.

제5공화국정권의 무리한 출범은 처음부터 강한 도전과 저항을 동반하였으며 정권의 유지는 그러한 반대세력의 철권적 억압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정부 관료제의 폐단 가운데서 결과적·기술적 요인들을 제거하는 행정개혁사업이 일부의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리고 1970년대까지 거침없이 진행되었던 정부관료제 팽창경향에 제동을 걸어보겠다는 필요인식에 따른 개혁도 있었다. 그러나 제5공화국의 권력중추가 희망했거나 천명한 바와 같은 선진민주행정의 구현에는 근본적으로 접근하지 못하였다.

제6공화국 이후의 정부관료제는 작은 정부를 구현하는 개혁대상이 되었다. 특히 1990년대 말의 금융위기와 경제위축은 정부관료제를 광범위한 구조조정의 압력하에 놓이게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정부관료제는 급속히 진행되는 민주화·지방화·세계화·정보화 등에 대응해야 한다는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우리 나라 정부관료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국가발전을 주도하는 역군으로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실책도 저질렀으며 스스로의 체제적 폐단도 누적시켜 왔다. 산업화시대를 지나 정보화시대를 열어가게 되면서부터 정부관료제의 병폐는 더욱 심각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정부관료제의 낙후성 내지 폐단이라고 지적되고 있는 것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행정의 과잉팽창을 들 수 있다. 발전행정의 과정을 거치면서 거대정부가 등장하고 행정국가화(行政國家化) 현상이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사회 전반에 걸친 행정 부문 압도의 전통이 세워졌다. 행정여건이 변함에 따라 행정의 팽창이 지나쳤고 국민생활에 대한 규제와 간섭도 지나쳤다. 결과적으로 작고 유능한 행정의 요청에 역행하는 크고 무능한 행정이 되었다.

② 만연된 정치·행정적 부패를 들 수 있다. 부패문제와 얽혀 있는 것은 정당성 없는 정치·행정의 유산이다. 우리에게는 청산해야 할 정당치 못한 과거의 잔재가 너무 많다.

③ 관료적 구조의 병폐는 여러 가지이다. 행정농도의 심화, 구조운영의 왜곡, 계급인플레, 구조의 경직성, 과잉집권과 기능분립주의, 할거주의 등을 구조적 폐단의 예로 들 수 있다.

④ 권위주의적 관리체제를 들 수 있다. 정부관료제의 관리체제는 임무중심적이라기보다는 지위중심적·권한중심적 성향을 짙게 가지고 있다. 이러한 관리성격이 빚어내는 행정문화는 권위주의적인 것이다.

⑤ 행정과정의 비효율성을 들 수 있다. 행정활동의 과정은 비효율적인 법령의 규정과 번문욕례(繁文縟禮:지나치게 번거롭고 까닭이 많은 禮文) 때문에 업무수행의 적시성과 상황적응성을 보장하지 못한다. 행정과정의 지나친 비밀주의도 문제이다. 행정의 정보화는 기대수준에 현저히 미치지 못한다.

⑥ 정부관료제의 중요한 산출인 정책의 조정기제가 취약하며 정책의 조령모개와 일관성결여도 심한 것으로 평가된다.

⑦ 취약한 변동대응성을 들 수 있다. 급속한 여건변화에 대응하는 능력이 취약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변동저항적인 경우가 많다.

앞으로 우리 정부관료제는 많은 개혁을 겪어야 한다. 행정개혁의 제1원리로는 국민을 위한 개혁이어야 한다는 원리가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기본원리하에서 정부관료제 내외의 민주화·인간화를 촉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여러 방면에 걸친 통합성의 제고를 위해 힘써야 할 것이다. 또한 행정개혁은 정부관료제의 활동 전반에 걸친 성과주의 구현에 지향되어야 한다.

행정개혁은 작고 유능한 정부관료제를 구현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민간화를 촉진해야 하며 노폐화된 기구와 사업을 폐지하고 절약이 가능한 인적·물적 자원의 감축에 부지런히 힘써야 한다. 세계화·지방화·정치화의 요청에 부응하는 정부관료제의 기능 감축도 서둘러야 한다.

반부패(反腐敗)의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여야 한다. 정보화를 선도하는 개혁도 촉진해야 한다. 정부관료제는 스스로의 정보화를 촉진해야 하며 사회 전반의 정보화과정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행정환경의 격동성에 대응할 수 있도록 정부관료제를 개편해야 한다. 격동성에 대응하는 행정개혁에서는 행정체제의 유연성과 적응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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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오석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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