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경휘(景輝), 호는 낙주(洛洲). 이조좌랑 구변(具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봉사(奉事) 구광원(具光遠)이고, 아버지는 군수 구계(具棨)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이기(李耆)의 딸이다. 장단의 낙하(洛河)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고, 권필(權韠)에게서 시를 배웠다.
1618년(광해군 10) 생원시에 2등으로 합격하고, 1624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을 거쳐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을 역임하고 정언(正言)이 되어 반정공신에 아무 공 없이 오른 사람들을 깎아내릴 것을 강력히 주청하였다.
1631년 수찬을 거쳐 이조좌랑이 되어 박지계(朴知誡)가 주장한 인조의 사친추숭(私親追崇)을 반대하다 체직되었다. 얼마 뒤 사가독서하고 응교(應敎)·승지를 거쳐 병조참의가 되었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아 서천군수·나주목사를 거쳐 1638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이어 경상도관찰사를 재임하고 호조참의가 되어 비변사제조(備邊司提調)를 겸하였다. 이 때, 이계(李烓)가 조선과 명나라가 밀통한 사실을 청나라에 고변하여 사세가 급박해지자 사태를 잘 마무리하고, 아울러 이계를 붙잡아 급히 참수하여 후환을 없앴다.
또 청나라에 붙어 권력을 휘두른 정명수(鄭命壽)를 믿고 횡포를 부리던 종제를 목베어 기개를 세상에 떨쳤다. 평안도관찰사로 재직중 임지에서 죽었다. 사람됨이 강직하였으며, 재치가 있었고, 권력에는 추호도 아부하려 함이 없었다. 그 재치가 청나라와의 외교에서 마찰을 줄여 인조로부터 한때 제일의 신하로 신임을 얻었다. 시호는 경헌(景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