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원유(元裕), 호는 초당(草塘). 구희경(具希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감찰 구순(具淳)이고, 아버지는 좌찬성 구사맹(具思孟)이며, 어머니는 증 영의정 신화국(申華國)의 딸이다. 인헌왕후의 오빠이다.
1585년(선조 18)에 사마시를 거쳐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고 곧 박사로 올랐다. 1589년 승정원주서(承文院注書)로 천거되었으나 종형 구면이 한림(翰林)에 있어 상피(相避: 친족이나 서로 친밀한 관계에 있는 자는 같은 곳에서 벼슬하는 것을 피함)로 임명되지 못하였다.
예조좌랑·지제교(知製敎)를 거쳐,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기축옥사에 연루된 최영경(崔永慶)의 공초(供招: 죄인이 범죄 사실을 진술한 말)에 착오가 있어 파직되었다. 얼마 뒤에 병조좌랑으로 복직,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병조정랑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임금을 호위해 개성에 이르러 변란의 책임이 이산해(李山海)에게 있다고 주장하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았고, 이 일로 인해 이산해는 평해에 유배되었다.
시강원문학·지평(持平)을 거쳐, 응교(應敎)·집의(執義)·사간·필선(弼善)을 역임하고, 1593년에 동부승지·좌부승지·첨지중추부사를 거쳐서 1594년 형조참의·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596년 호조참판으로 주문사(奏聞使)가 되어 연경(燕京)에 다녀온 뒤 장례원판결사·해주목사를 지냈다. 1601년 대사성으로 승진했으나 사양하였다. 1602년에 정인홍(鄭仁弘) 등이 기축옥사 문제를 다시 거론하면서 홍주로 유배되었다가, 1604년 아버지상을 당해 석방되어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그러나 이 때 대간의 심한 탄핵이 있었다.
1618년에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병으로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이를 처벌하자는 대간의 논의가 있었으나 마침 병으로 죽었다.
인조반정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