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윤일이(尹一二) 또는 권명구(權命九). 경상남도 함양 출신.
군대해산 직후인 1907년 8월에 기우만(奇宇萬)·고광순(高光洵)·김동신(金東臣) 등이 회합해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동지를 규합하였다. 이 때 창의(倡義)에 가담해 의병진에 들어가서 고광순의 휘하에서 지리산 연곡사(燕谷寺)·쌍계사 등지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10월에 고광순이 연곡사에서 전사하자 의병들의 여론에 의해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선봉장에 이학로(李學魯), 중군장(中軍將)에 김경각(金敬珏)·우수보(禹守甫), 후군장(後軍將)에 박매지(朴每之)를 임명하는 등 의병진을 정비하고 지리산 일대를 근거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경상남도 하동에서 박인환(朴仁煥)의 권유로 그의 의병진에 가담하였다. 박인환과 의병들의 추대를 받아 의병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1908년 6월 부하 5명을 무장시켜 하동의 여건상(余健相)으로부터 1000냥(兩)을 10일 후에 출연(出捐)한다는 증표를 받아내는 등, 각 고을의 부호·유지들로부터 군자금과 무기를 모집하는 활동을 전개하다가 하동의 일본군 수비대에 잡혔다.
잡힌 지 20여 일 만에 구금되어 있던 하동주재소에서 탈주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토벌대의 추격으로 가슴에 총상을 입어 장기간의 치료를 받았다. 상처가 거의 아물자 이듬 해인 1909년 3월 다시 이학로 등과 합세해 진주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며 활동하였다.
같은 해 10월 진주에서 행상으로 변장해 민가에 투숙하고 있던 중 잡혀, 12월 부산지방재판소 진주지부에서 종신징역형을 언도받았다. 대구공소원(大邱控訴院)에서 형이 확정되어 6여 년을 복역하다가 1916년 6월 가석방되었다.
1918년 2월 다시 요시찰인(要視察人)이라는 명목으로 검거되어, 미결수인 채로 옥고를 치르다가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의 무죄판결로 석방되었다.
1986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