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선무공신녹권(宣武功臣錄券)」, 「권응수장군영정」, 「태평회맹도병풍(太平會盟圖屛風)」, 장검, 유지(有旨) 및 장군간찰(將軍簡札), 교지(敎旨), 유서(諭書), 각대(角帶), 『가전보첩(家傳寶帖)』 등이다. 이 유물들은 권응수가 생전에 쓰던 물건, 임금에게서 받은 하사품과 전리품 등 후손 집안에 전해 오는 유품들이다.
「선무공신녹권」은 1604년(선조 37년) 10월에 정립(鄭笠)이 짓고 김현무(金玄武)가 쓴 것으로 세로 39.4㎝, 가로 28㎝이다. 그 내용은 1등에 이순신(李舜臣) 외 2인, 2등에 신점(申點)과 권응수 외 3인, 3등에 정기원(鄭期遠) 외 9인을 수록하여 권응수에게 하사한 것이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경상우도 순찰사 김성일을 도와 왜군에 대항하였다. 그 공으로 선무공신 2등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졌다.
「권응수장군영정」은 선조(宣祖)가 하사한 초상으로 17세기 초의 대표적인 공신초상화이다. 크기는 세로 202㎝, 가로 104㎝이다. 경상북도 영천 백운재서원(白雲齋書院)에 봉안하였다가 현재는 국립진주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오른쪽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은 전신상[全身交倚坐像]이다. 공수(拱手 : 두 손을 앞으로 모아 포개어 잡음)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양쪽으로 벌린 발 아래로 낮은 족좌대(足座臺)가 놓여 있다.
그가 입은 단령은 단호흉배(單虎胸背 : 한 마리의 호랑이를 수놓은 흉배로 당하관의 무관이 사용)에 삽금대(鈒金帶 : 황금 띠돈을 단 허리띠)를 두른 것으로, 흉배와 각대로 미루어 보아 이 초상화가 선무공신상임을 알 수 있다. 부분적으로 탈락되고 손상되었다. 그러나 보존 상태가 좋으며 세부 묘사와 전체적인 안정감을 잃지 않은 수작이다.
「태평회맹도병풍」은 4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로 280㎝, 가로 120㎝이다. 맨 오른쪽 면에 임진왜란 뒤의 공신들을 그림으로 배열한 계회도(契會圖) 형식을 취하고 있다. 좌목(座目 : 참석자의 명단)은 다른 계회도들과 달리 옆 병풍에 따로 만들었으며 그곳에 공신의 본관, 생년, 성명 등을 기록하였다. 매우 특이한 구성 형식으로 처음부터 사곡병(四曲屛)이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그림의 윗면에는 원산(遠山)을 배치하고, 그 아래 왼쪽으로는 한 그루의 나무를 그렸다. 그리고 중앙에서 약간 왼쪽으로 치우쳐 회랑(回廊)으로 구획진 넓은 마당을 두어 그 내부에 공신들을 좌우 1열, 하단 3열로 그려 넣었다. 회랑 우측면에는 한 그루의 굴곡진 나무와 지붕만이 낮게 묘사된 두 채의 집이 그려져 있다.
과장된 장막(帳幕)의 표현이나 매우 작게 묘사된 인물들 그리고 그와 대조적으로 크게 그려진 기물 등이 같은 시기에 제작된 「이원익사궤장겸기로회연도(李元翼賜几杖兼耆老會宴圖)」의 구성 방식이나 필치와 매우 흡사하여 주목된다. 또한 풍경보다 장면 묘사에 더 충실하고 그 배경을 생략한 점 등은 같은 시기의 계회도들과 유사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제작 시기는 권응수가 선무공신을 받은 1604년으로 추정된다.
장검은 임진왜란 당시 왜장 키하치(喜八)에게서 노획한 것으로 전한다. 손잡이에 대영원년(大永元年, 1521년)이라는 명기가 있다. 유지의 크기는 세로 43㎝, 가로 27㎝이다. 1594년부터 1606년까지 작성된 선조의 지령문과 1604년에서 1624년까지 작성된 교지 및 유서는 33매이며 합철되어 있다. 세로 51㎝, 가로 27㎝이다. 각대는 금속 각대이며 길이가 150㎝이다.
『가전보첩』은 상하 2권이다. 상권은 세로 45㎝, 가로 41.7㎝에 26매이며 시 60수가 수록되었다. 그 작자는 채팽윤(蔡彭胤), 유승무(柳昇茂), 신구중(愼龜重) 등이다. 하권은 세로 46.3㎝, 가로 34㎝로 27매이며 시 43수가 수록되었다. 신후담(愼後聃), 권목(權睦) 등이 지은 것이다. 이 『가전보첩』은 당시의 서체나 시문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