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이북면(二北面)과 낙양면(洛陽面)의 주민 수백명이 환곡이전(還穀移轉)에 따른 폐단을 항의하며 그 시정을 관서에 호소하자, 현령 민세호(閔世鎬)는 이를 단순한 민원으로 받아들여 흥분한 군중들을 진정시키려 하였다.
그 때 마침 전라도 지역의 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파견된 호남선무사 조구하(趙龜夏)가 그곳에 도착하자, 수천 명이 그에게 몰려가 자신들의 억울한 사정을 낱낱이 기록하여 제출하고, 부당하게 거두어들인 세전(稅錢) 수만 냥을 당장 되돌려주어야 물러가겠다고 하였다.
선무사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들을 무마하려 하였으나 끝내 해산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욱 난폭해진 난민들은 관마를 때려죽이고, 이방 온남구(溫南耉), 구이방(舊吏房) 온평고(溫枰古)의 집을 부순 뒤 관아로 진입하려 하였다.
이에 역졸들이 무력으로 진압하자 비로소 흩어졌으나, 선무사가 고부에서 전주에 이르자 금구의 난민들이 길을 막고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감영에서는 집사(執事)ㆍ영리(營吏)ㆍ사령ㆍ뇌자(牢子) 등을 금구에 보내어 호위하게 함으로써 전주에 이를 수 있었다.
난이 수습된 뒤 주동자 박용운(朴龍雲) 등은 효수되고, 가담자 가운데 상당수가 하옥되거나 장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은 조선 후기 삼정문란에 대한 민중저항운동의 한 모습이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