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광무 원년) 중추원 참서관(參書官), 1902년 평리원(平理院) 검사(檢事), 경무청 경무국장을 지냈다. 1903년 경무사서리(警務使署理) 재직시 내장원의 고미(庫米)가 시전상인(市廛商人)을 거쳐 간상(奸商)에게 싸게 팔려나가 은닉되어 모리(牟利)를 꾀하고 있다는 얘기가 항간에 떠돌았다.
이를 잘 단속하지 못한 책임이 있다 하여 시종원경(侍從院卿) 이유인(李裕寅)과 함께 견책을 받았고, 그 자신은 2개월 감봉처분을 받았다. 이 후 1905년 다시 경무청 경찰국장에 임명되고, 1906년 경무사, 중추원 찬의, 1907년 임시서리 경무사사무, 경무사 등을 지냈다.
1907년 5월 군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이 백주에 저격당하고, 심사국장(審査局長) 박용화(朴鏞和)가 집에서 피습된 사건이 발생하자 박제순·이지용 등으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같은 해 6월 중추원 찬의를 거쳐 경상남도 관찰사를, 1908년 경기도 관찰사를 지냈고 1910년 2월에 3등훈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