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산(光山). 학문을 좋아하였고, 성격이 침착, 관후하며 과묵하고 누구와도 함부로 사귀지 않았다. 음서(蔭敍)로 부성위(富城尉)가 되었다.
1264년(원종 5) 5월 과거에 수석으로 합격하였으며, 그 뒤 해양부녹사(海陽府錄事)에 임명되고, 또 김준기(金俊器)의 추천에 의해 내시(內侍)직에 소속되었다가 여러 번 관직을 옮겨 이부시랑에 이르렀다.
1275년(충렬왕 1) 대부경 좌사의대부(大府卿左司議大夫)에 임명되어, 이듬해 안렴사(按廉使) · 수령들의 근무태도와 공물 · 부역이 고르지 않은 것과 향리가 세력을 믿고 부역을 피하는 등의 폐단을 없애기 위한 대책을 올려 채택되었으나, 좌우의 저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1278년(충렬왕 4) 충렬왕이 원나라에 갈 때 우부승지로서 수행해 다루가치(達魯花赤)와 왕경유수군(王京留守軍) · 합포진수군(合浦鎭守軍) 및 황주 · 봉주(鳳州) · 염주(鹽州) · 백주(白州) 둔전군의 뒷받침이 번거로워 백성들의 고통이 심한 것과, 김방경(金方慶)이 무고를 입어 유배된 사실 등을 원나라에 밝힌 공으로 귀국해 좌부승지로 임명되었다.
또한, 그 해에 재추회의(宰樞會議)에서 따로 필도치(必都赤)를 두어 중요한 국사를 담당하게 하도록 건의하였으며, 또 내료(內僚)의 계사(啓事: 궁중의 관리가 임금에게 정사를 알리는 일)를 금지하고 신문색(申聞色)이 대신하도록 주장하였다.
이것이 관철되어 필도치와 신문색에 뽑힌 사람들이 궁중에 모여 중대사를 결정하니 이를 당시 사람들은 ‘별청재추(別廳宰樞)’라 불렀다.
김주정이 자기 딸을 대장군 윤수(尹秀)의 아들에게 출가시키면서 윤수를 승지에 임명하도록 청하므로 조인규(趙仁規)가 예가 아니라고 하자, 다시 내료에게 청해 비난을 받았다. 또한, 응방도감사(鷹坊都監使)가 되어 매와 사냥개로 왕에게 아첨해 권세를 부리기도 하였다.
1280년(충렬왕 6)에는 중서성에 청해 소용대장군 좌우부도통(昭勇大將軍左右副都統)이 되고, 호두금패(虎頭金牌)와 인(印)을 받았다. 다음 해에 김방경과 같이 군사를 거느리고 합포로 향하였으며, 5월에는 주사(舟師)로서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대명포(大明浦)에 이르렀으나, 태풍을 만나 병선이 전복되어 많은 군사들이 익사하게 되었는데 이 때 많은 사람을 구출하였다.
1284년(충렬왕 10) 진변만호(鎭邊萬戶)가 되면서 남도의 해변을 순력하였다. 이 무렵 수선사(修禪社)에 있던 충지(冲止)는 5월 하순에 절박한 당시 사정을 시로 지어서 김주정에게 보낸 적이 있다.
이 시에 의하면 김주정은 충지를 방문하기로 약속되어 있었으나 이를 어겼다고 한다. 1287년(충렬왕 13)에 군신이 모여 연회를 할 때 무례한 행동을 해 청주목사로 좌천되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