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뢰한으로 강도(江都)에서 처형된 윤양삼(尹養三)의 아들로, 부원(附元)세력가이다.
원종 때 친종장군(親從將軍)으로서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使) 조오(趙璈)로부터 권신 임연(林衍)의 제거 계획을 제의 받아 거짓 승락한 다음, 임연에게 사실을 고해바침으로써 해를 입혔다.
1270년(원종 11) 무신정권이 무너지면서 조오의 모해사건에 대한 책임 추궁을 우려, 추밀원부사를 지낸 장인 송의(宋義)와 함께 가속을 이끌고 원나라로 도망갔다. 이 때 원나라에 볼모로 있던 세자(충렬왕)에게 응견(鷹犬: 사냥하는 데 쓰이는 매와 개)을 인연으로 총애를 받았다.
1274년 충렬왕이 즉위하자 귀국하여 대장군에 오르고 이정(李貞)·원경(元卿) 등과 함께 응방(鷹坊)을 관장하며 권세를 부렸다. 1279년(충렬왕 5)에는 전라도응방사(全羅道鷹坊使)로 파견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탐학과 횡포를 자행하여 사람들로부터 금수(禽獸)로 불릴 정도였다.
또한, 유망민들을 모아들여 이리간(伊里干: 응방 등에서 촌락이 없는 곳에 유민을 불러 모아 세운 취락)이라는 취락을 형성하여 응방의 경제적 기초로 삼았는데, 이들에 의한 민폐 또한 극심하여 안찰사(按察使)나 지방의 수령들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벼슬이 군부판서(軍簿判書)·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에 이르렀으며, 고려 후기에 응방을 통하여 진출한 대표적 인물로 꼽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