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5년(성종 14)에 설치된 액정국은 개국 초부터 있어온 액정원(掖庭院)의 후신으로, 왕명의 전달과 왕이 사용하는 붓과 벼루의 공급, 궁궐문의 열쇠·자물쇠의 관수(管守) 및 궁궐내 뜰의 설비 등에 관한 제반잡무를 총괄한 대표적인 잡직관서이다.
그 직제는 문종 때 정해졌으나, 이후 여러 차례 명칭 및 직제의 변동이 있었다. 더구나 100년간에 걸친 무신정권과 곧 이은 원나라와의 강화로 고려의 전통적인 관제가 문란해짐에 따라 궁궐내 내료(內寮 : 궁중에서 잡무를 맡은 벼슬아치의 총칭)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여 많은 폐단을 야기시켰다.
따라서 1278년(충렬왕 4)김주정(金周鼎)의 건의로 특별히 왕명전달과 계사(啓事)를 맡는 내료를 골라 신문색으로 하였는데, 이 때 액정국이라 하지 않은 것은 당시 몽고식 표현이 혼용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 뒤 1308년 내알사(內謁司)라 개칭하였다가 이듬해 액정국으로 고치고, 1310년에는 항정국(巷庭局)으로 하였다가 고려 말에 다시 액정국으로 환원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고려 때 체제를 기반으로 액정서(掖庭署)가 세워져 직제가 보다 세분되어 궁궐 내 제반잡무를 책임지었다. 더구나 직책은 낮아도 국왕의 측근에서 왕을 보필하였던 자리였으므로, 그들의 실권은 대단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액정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