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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金燦)

근대사인물

 일제강점기 고려공산청년회 중앙간부, 조선청년총동맹 집행위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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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김찬 전후면
이칭
김낙준(金洛俊), 정만(鄭滿), 권일수(權一秀), 서여림(徐如林), 황기룡(黃起龍), 수암(水岩)
분야
근대사
유형
인물
성격
사회주의운동가
성별
출생일
1894년(고종 31)
사망일
미상
경력
고려공산청년회 중앙간부, 조선청년총동맹 집행위원, 정의부 중앙집행위원
시대
근대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일제강점기 고려공산청년회 중앙간부, 조선청년총동맹 집행위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키워드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본명은 김낙준(金洛俊). 일명 정만(鄭滿), 권일수(權一秀), 서여림(徐如林), 황기룡(黃起龍), 수암(水岩). 함경북도 명천 출신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생애 및 활동사항
한문을 배우다가 함북 경성고등소학교, 성진(城津)중학교, 명천 진성(進成)중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12년 경성(京城)의학전문학교에 입학, 1년간 다니다 중퇴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명치대학(明治大學) 전문부 법학과에 입학하였다.
1년 뒤 명치대를 중퇴하고 북간도 국자가도립중학(局子街道立中學)에 입학했으나 다시 1년 만에 중퇴하였다. 1917년 일본 동경에서 모직공장에 직공으로 취직했고, 이 시기 사회주의 관련 서적을 읽었다.
1919년 4월 명치대학에 재입학하고, 그 해 일본 중앙대학(中央大學) 정치과로 전학하여 2년간 수학한 뒤 중퇴하였다. 중앙대 재학중 일본인 사회주의자들과 교류하였다. 1920년 하반기 이르쿠츠크 소재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 출두, 극동민족대회 일본인 대표 출석 문제를 협의하였다.
그 해 재일 유학생들로 구성된 고학생동우회에 가입하였다. 1921년 11월 동경에서 흑도회 결성에 참여하였다. 1923년 1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간부와 국내에서의 공산당 조직에 관해 협의하였다.
4월 코르뷰로 국내공작의 임무를 띠고 입국, 비밀리에 조선공산당 결성을 준비하였다. 6월 코르뷰로 국내부와 공청뷰로 결성에 참여하고, 공청 중앙간부가 되었다.
이후 신사상연구회 회원, 신인공론사(新人公論社) 주간, 화요회 상무집행위원, 신흥청년동맹 집행위원장, 한양청년연맹 집행위원, 조선청년총동맹 집행위원, 혁청당원, 4단체 합동위원 등을 지냈다.
1925년 4월 서울에서 열린 조선공산당 창립대회에 출석하여 선전부장이 되었다. 비슷한 시기 고려공청 결성대회에 출석해 중앙위원이 되었다. 같은 해 7월 화요회의 일원으로 ‘4단체합동위원회’에 위원으로 참가하였다.
12월 ‘제1차 조선공산당검거사건’ 때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 망명 간부들과 함께 조선공산당 해외부를 결성하고 책임자가 되었다. 1926년 6·10만세운동을 계획·지도하였다.
같은 해 7월 조공 해외부가 해체되자 블라디보스토크로 활동 근거를 옮겼다. 12월 국내에서 열린 조공 제2차 대회가 분파적·불법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판단하고, 코민테른에 출두해 승인 반대진술을 하는 등 반대파 활동에 참여하였다.
1927년 7월 북만주로 활동 근거를 옮겼다. 10월 ‘제1차 간도공산당검거사건’으로 파괴된 조공 만주총국(화요파)의 재건을 주도하였다.
이후 당 만주총국의 간부로서 조선인농민조합, 북만조선청년총동맹 결성을 주도하고 신민부 반대운동에 앞장섰다. 1928년 9월 길림에서 정의부에 참가해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1929년 1월 남만조선인청년총동맹 결성에 참여하였다.
그 해 6월 정의부와의 제휴 여부를 둘러싸고 당 만주총국 내에서 이견이 발생하자 민족통일전선 전술의 지속을 주장하여 당내 소수파가 되었다. 12월 당 만주총국 위원직에서 해임되었다. 1930년 아성현(阿城縣) 해구(海溝)에서 조선인 보통학교 교사가 되었다. 1931년 5월 국내에 잠입했다가 서울에서 검거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2001년)
류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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