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나주 출신. 일명 나상집(羅相集), 나성화(羅聖化).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던 1907년 박영근(朴永根)·유종환(兪鍾煥)과 함께 나주에서 의병을 규합, 전수용(全垂鏞)·김동신(金東臣) 등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의병장 심남일(沈南一)이 1908년 2월경 함평·남평·보성·장흥 등지에서 다시 6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부대를 확대, 정비하자 이에 가담하여 노병우(盧炳友)·최우평(崔友平)·김성재(金聖載)와 같이 후군장(後軍將)에 임명되었다. 이렇게 하나의 직책에 여러 명을 두는 것이 심남일부대의 특징이었다.
이후 총기 40여 정으로 무장한 40여 명의 의병을 지휘하여 나주·무안·영암·남평 등지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으며, 다음 해 7월에는 사초십장(四哨什長) 정낙중(鄭洛中) 등 20여 명의 부하를 지휘하여 일본인 구리야마[栗山鶴吉]의 집에 돌입, 그를 총살하고 금품을 빼앗아 군자금으로 사용하였다.
7월 21일에 심남일이 국왕의 해산조칙(解散詔勅)에 따라 영암에서 의병을 해산하자 뒷날을 기약하며 피신하였다가, 9월 일본군에 붙잡혔다. 1910년에 광주로 이송되는 도중 호송하던 일본군 2명을 때려눕히고 탈출을 기도하였으나 실패, 순국하였다.
1986년에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