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까지 알려진 『잡과단회방목(雜科單回榜目)』에서 남영의 의과 입격 사실이 나오지 않아서, 의술에 정통하여 천거 또는 취재(取才)로 침의가 된 것으로 짐작된다.
1601년(선조 34) 유학(幼學)으로 침의로 발탁되었고, 남영이 혈을 잡고 허임(許任)이 침을 들어 효험이 있었다고 하며, 이로 인해 두 사람 모두 한 자급(資級)이 더해졌다. 선조대까지 어의로 활약하여 자품(資稟)이 더해지고 장흥고(長興庫) 직장, 양성(陽城)현감에 제수되었다. 1607년 1월에 양지현감 박채(朴綵)와 더불어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 일행이 관내를 통과할 때 전별(餞別)하였다.
광해군 연간에도 침의로서 허임, 전 현감 김영국(金榮國), 전 사과(司果) 김징(金澂) 등과 기용되었다. 군직(軍職)을 받은 남영은 이어서 특지(特旨)로 경기도 내 음죽(陰竹)현감에 제수되었다. 1616년(광해군 8) 사망하였이다. 둘째 아들 남창조(南昌祖)도 아버지를 이어서 인조 말년부터 현종대까지 침의로 어전에서 활약하였고, 그 공로로 청양현감, 과천현감에 제수되었다.
1700년(숙종 26)에 세워진 경상도 함창의 청암사(淸巖祠)에 효자로서 남영의 위패가 모셔졌다. 남영은 1604년(선조 37) 장흥고 직장으로 있을 때에 어머니를 위해 귀성하려고 공무 차임의 소장을 냈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