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8일 대구에서 전개되었으며, 영남 3·1운동의 효시(嚆矢)로 학생들 주동으로 일어났다 하여 ‘학생 의거’라고도 한다.
서울에서 3·1운동의 거사 준비가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을 때, 이곳 기독교계의 유지 이만집(李萬集)·이상백(李相佰)·백남채(白南埰) 등은 경상도의 연락책임을 맡은 이갑성(李甲成)으로부터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전해 들었다.
그 뒤 3월 2일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 이용상(李容祥)을 통해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였다. 그리고 같은 교회의 김태련(金兌鍊)·김영서(金永瑞) 등과 만나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8일 서문외(西門外) 장날을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여기에 계성학교(啓聖學校)·대구고등보통학교(大邱高等普通學校)·신명여학교(信明女學校)·성경학교(聖經學校) 학생들과 연도의 주민·기독교인·천도교인 등이 가세하여 군중의 수는 1,000여 명이 되었다.
만세시위 대열이 경찰서를 지나 달성 군청 앞에 이르렀을 때, 기관총 5, 6대로 무장된 일본 헌병 및 경찰에 의해 시위대는 저지되었다. 그리고 이 때 157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거사 뒤 대구의 학생들과 주민의 항일 저항 의식은 날로 높아져 재의거를 위한 협의가 계속되었다. 이에 당황한 일본 경찰은 대구고등보통학교·계성학교·신명학교 등에 3월 10일부터 휴교령을 내려는 한편, 삼엄한 경계를 펼치자 학생들은 지하로 숨어들어 만세운동을 계속하여 다른 지방으로 확대시켜 나갔다.
그 밖에 3월 30일동화사(桐華寺) 부속의 지방학림(地方學林) 학생 권청학(權淸學)·김문옥(金文玉) 등은 대구 남문외 장터에서 3,0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4월 15일대구 대명동 공동묘지에서 최경삼(崔敬三)의 딸 제례에 모였던 50여 명의 군중에 의해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