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영남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견, 조사되었다. 유적이 있는 주변지역은 대구지방 고인돌떼가 분포된 곳으로, 낙동강 본류가 북에서 남으로 관통하는 평야지대에 속한다. 유적은 이미 파괴, 교란되어 표면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었으며, 밭갈이 도중 간석기 등이 발견되어 신고되었다.
조사된 3기의 고인돌 하부구조는 대체로 일직선상에 분포한다. 제1호와 제2호 사이의 중심거리는 2.08m이고 제1호와 제3호는 11.6m 가량 떨어져 있다. 따라서 제1호와 제2호는 같은 덮개돌로 볼 수 있으나 3호는 다른 덮개돌로 추정된다.
그러나 발견 당시에는 파괴되어 덮개돌은 없고 하부구조만 남아 있었다. 이와 50m 정도 거리를 두고 분포된 인근의 고인돌들은 편평형과 괴석형(塊石形)의 덮개돌들이 남아 있어 이 고인돌의 덮개돌의 형태를 짐작케 한다.
제1호 고인돌의 하부구조를 살펴보면, 크기 27㎝×25㎝×15㎝ 정도인 편평한 냇돌을 사용해 쌓고, 장축이 서북-동남향인 돌덧널[石槨] 구조이다. 돌덧널은 남쪽 일부만 남아 있을 뿐 대부분이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다.
바닥에도 벽석에 사용한 것과 같은 납작한 냇돌을 깔았다. 일부 남아 있는 벽석으로 보아 돌덧널 내부의 크기는 남북 길이가 170㎝이며, 너비는 서벽과 동벽 사이 너비인 42㎝ 정도로 보인다.
출토유물은 길이 21.3㎝, 너비 3㎝인 간돌검 1점과 완전한 것 및 파손품을 포함한 4점의 돌화살이 있다.
제2호 고인돌은 제1호와는 달리 돌널무덤으로 보인다. 제1호 석실의 북쪽 끝에서 42㎝ 가량 떨어져 있으며 장축방향 또한 일정하다. 돌널은 편암으로 된 판자돌을 사용해 동·서·남벽을 세웠고, 북벽은 냇돌로 단을 지어 쌓아 막았다.
남아 있는 돌널 내부의 크기는 남북 길이 120㎝이고, 너비는 위쪽이 넓고(29㎝), 아래쪽이 약간 좁다(18㎝). 바닥은 벽과 같은 판잣돌 2매를 깔아 만들었다. 돌널의 뚜껑돌은 확인할 수 없었다. 돌널의 주위는 냇돌을 사용해 쌓았으며, 크기는 길이 175㎝, 너비 100㎝ 정도이다.
출토유물로는 민무늬토기편과 붉은간토기편이 있고, 돌널 바깥에서 골아가리토기와 비슷한 토기편도 발견되었다.
제3호 고인돌은 제1호와 떨어져 있어 다른 덮개돌을 덮은 것으로 추정된다. 하나의 돌널을 칸막이해 작은 것(A)과 넓은 것(B)으로 나누었다. 돌널의 석벽은 납작한 판자돌을 사용해 짰고, 벽석의 상부도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석재는 제2호에서와 같은 편암제이다.
돌널의 크기는 A가 길이 116㎝, 너비 22㎝, 깊이 31㎝, B가 길이 110㎝, 너비 47㎝, 깊이 40㎝이다. 바닥은 A의 경우 벽석과 같은 판자돌 1장을 꼭 맞추어서 깔았고, B는 판자돌없이 맨 바닥 위에 자갈돌을 다졌다. 널의 뚜껑돌은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다. 주위로는 돌널을 중심으로 150㎝×200㎝ 범위에 자갈돌을 돌려 쌓았다.
출토유물로는 민무늬토기와 검은간토기편 및 아가리토기편이 있다. 한편, B돌널 내부에서 두개골 파편과 치아 및 대퇴골 등이 남아 있는 20세 전후의 여성으로 추정되는 사람뼈가 발견되었다.
이러한 고인돌의 구조들은 대구 대봉동 유적과 비슷하다. 장법(葬法)에 있어서는 널의 병존관계로 보아 가족무덤으로 볼 수 있다.
시기는 하부구조 및 출토된 토기류 등으로 보아 서기전 3세기에서 2세기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