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돌은 제3호 고인돌을 중심으로 6기가 방사상으로 분포되어 있다.
이 고인돌들에는 후대인 1795년(정조 19)에서 1797년(정조 21) 사이에 경상감사로 재임중이던 이태영(李泰永)이 꿈속에서 북두칠성이 고인돌 자리에 떨어진 것을 보고 고인돌 덮개돌 위에 각기 일곱 아들의 이름을 새겨놓아 후손의 번영을 기원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또한, 이 고인돌들을 ‘칠성암(七星巖)’으로 부르고 이후에도 토속적 신앙의 대상이 되어왔는데, 칠성동이라는 마을명칭도 여기에서 기원된 것이다.
1973년 경북대학교에서 발굴조사하였는데, 덮개돌의 크기는 제1호가 길이 3.2m, 너비 2.7m, 두께 1.3m이고, 제2호가 1.5×1.1×1.1m, 제3호가 1.8×1.4×1.7m, 제4호가 1.7×1.6×1.8m, 제5호가 2×1. 5×1.5m, 제6호가 2×0.8×1.2m, 제7호가 2×1.3×0.8m이다.
덮개돌 아래에는 굄돌이 없었고 지하 유구의 조사에서도 제1·2·5·7호에서 덮개돌 아래에 15∼30㎝의 돌무지[積石]가 있었을 뿐 제3·4·6호에서는 아무런 시설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들 고인돌에서는 부장품이 전혀 없었고 지하에서도 널의 시설이 발견되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보아 애초부터 무덤으로서의 성격보다는 거석기념비적인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