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예술사의 1990년대가 시작된 1992년에, 대중가요에서도 「난 알아요」의 서태지와아이들을 필두로 한 새로운 바람이 일어났다. 이는 신세대문화의 바람을 타고 있었고, 기획영화와 트렌디드라마 등 대중예술의 대대적 변화 조짐과 함께 이루어진 현상이었다. 또한 이는 30년 동안 이어진 군인 출신 대통령과 민주화운동 시대, 그리고 냉전시대와 이념대립의 시대가 종말을 맞은 시기와 맞물려 있었다.
한국대중가요의 주류 경향은 단번에 댄스뮤직으로 바뀌었고, 발라드는 크게 위축되었다. 1970년대 생들은 ‘신세대’를 이 시대의 중심 화두로 던지며, 가볍고 욕망에 충실하며 솔직한 태도,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윤리에 대한 무감각, 소비 중심적인 생활방식 등을 도발적으로 드러내보였다. 서태지와아이들로 대표되는 댄스뮤직은, 이 신세대문화를 대표하는 음악이었고 그 뒤를 「나를 돌아봐」의 듀스, 「날개 잃은 천사」의 룰라, 「이유 같지 않은 이유」의 박미경, 「핑계」의 김건모 등이 이었다. 이들의 노래는 대부분 사랑노래이긴 했지만, 구세대의 고정관념의 타파와 자기해방의 선언을 포함하고 있었고, 따라서 가사와 형식에서 모두 파격적이었다. 이러한 댄스뮤직의 승승장구는 발라드가 신승훈을 중심으로 근근이 명맥을 이어간 것과 매우 대조적이다.
한편 댄스뮤직과 함께 이 시대를 견인한 것은 언더그라운드의 음악이었다. 「아주 오래된 연인들」의 공일오비, 「라구요」의 강산에, 「도시인」의 넥스트 등 이 시대의 언더그라운드는 문명비판으로부터 시작하여 점점 세상에 대한 발언 수위를 높여갔고, 록은 드디어 이 시대에 이르러 사회비판적인 사유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와 동반하여 이루어진 저항적 록 담론의 유행은 이러한 흐름을 다름 아닌 수용자들이 북돋우며 가꾸어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결국 수용자들의 요구에 응답하며 댄스뮤직과 언더그라운드가 경쟁적으로 밀고나간 이 시대의 파격성과 저항성은 1994, 95년 텔레비전에서 최고 인기를 구가하는 서태지와아이들조차 「발해를 꿈꾸며」와 「교실 이데아」, 「시대유감」 등 사회비판적 내용의 노래를 내놓는 상황에까지 치받쳐 올라간다. 한편, 김현철, 이소라, 패닉 등 매우 다양한 성향의 대중음악이 공존하며, 각기 자신의 할 말과 음악적 실험을 거리낌 없이 내어놓는 상황이 199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펼쳐졌다.
이러한 상승의 흐름은 1996년 서태지와아이들의 은퇴를 계기로 그 주도권이 텔레비전 영역에서 언더그라운드 영역으로 급격히 이동하지만, 외환위기가 오는 1997까지는 어느 정도 유지된다. 댄스뮤직 분야에서 「전사의 후예」의 HOT, 「사나이 가는 길」의 젝스키스 등 대형 기획사가 육성한 가수들의 세력이 주도하면서 반대로 언더그라운드에서는 사회비판적 태도와 대중음악산업에서 자본의 논리에 대한 반감도 크게 나타났고 그 결과 인디음악이 성장했기 때문이다.
제6공화국 이후 정태춘과 노래운동권이 지속적으로 제기해 온 음반 검열 철폐투쟁이 결실을 맺었고, 1996년에는 음반 검열이 사라져 이러한 언더그라운드와 인디의 표현의 자유 신장에 크게 기여했다. 넥스트의 「머니」, 강산에의 「태극기」, 황신혜밴드의 「짬뽕」, 크라잉넛의 「말달리자」, 패닉의 「벌레」처럼, 음반 검열이 존재했다면 도저히 음반화될 수 없었을 노래들이 음반으로 발표되었다. 1990년대 초중반 대중가요계는, 마치 1970년대 전반처럼 새로운 시도와 흐름들이 부글부글 끓는 용광로였다.
1998년 외환위기 시기부터 시작된 몇 년 간은 1990년대의 흐름이 크게 흔들리는 시기였다. 우선 ‘3저 호황의 시대’라 일컬어진 경제적 환경을 바탕으로 한 1990년대 대중가요의 파격적인 자유주의적 태도는, 국가부도를 걱정할 수준의 경제 환경에서 위축되었고, 가사와 내용 모두에서 보수적인 회귀의 태도를 보였다. 댄스뮤직은 위축되거나, GOD의 「어머님께」, 한스밴드의 「오락실」에서 확인되듯 저항적이지 않게 순치된 양상을 보이고, 대신 인간 간의 감정적 유대를 중시하는 발라드가 부활했다. 조성모의 「투 해븐」 등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주목할 만한 것은 음반산업이 위축되면서, 끝나가기 시작하는 음반의 시대가 매우 빠른 종말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인터넷의 시대에 돌입하면서 대중가요 전달의 매체가 음반에서 음원으로 바뀌었고, 그 과정에서 대중음악인들의 수입 창출 방식이 크게 악화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음반을 사기보다는 인터넷 사이트나 휴대전화에서 다운로드 받은 음원을 듣게 되었다. 불법복제가 손쉽게 이루어지는 과도기를 거치면서 음반산업은 붕괴됐고, 통신산업에게 유리한 수익금 배분 방식은 이러한 현상을 고착시켰다.
이러한 매체환경의 변화를 겪으며 노래 자체의 완성도와 호소력을 중시하는 작가주의적 매력을 지닌 노래들은 크게 위축되었다. 수용자들의 귀는 높아지고 감수성도 다양해졌지만 음반의 다양성은 크게 떨어지고 작가주의적 음악인들의 입지도 점점 약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따라서 클럽 연주와 페스티벌 등에 기대는 록과 재즈, PC통신이나 인터넷 같은 사이버공간을 통한 유통의 시도가 계속되고 있고 몇몇 성공사례가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다양한 대중가요·대중음악이 어떻게 이윤을 창출하고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지의 실마리는 찾아지지 않고 있다.
그에 비해 대형 기획사들은 두 가지 방향으로 빠르게 선회하며 이 상황을 돌파했는데, 하나는 노래 작품에 승부하는 가수보다는 쇼, 광고, 드라마 등을 고루 소화하는 만능 엔터테이너를 만들어 수익의 원천을 다변화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한정된 한국 시장을 넘어서는 해외 시장을 공략하는 방향이다. 그리고 이것의 귀결이 이른바 ‘케이팝’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에 알려진 노래들이다. 이들 노래의 특징은, 아주 쉽고 단순한 가사와, 매끈하게 정돈되었으나 역시 그리 어렵지 않은 음악, 섹시함으로 대중을 자극하는 가수들의 몸과 춤, 화려한 쇼 연출, 그리고 진지한 감상이 아닌 모바일 음향만으로도 빠르게 기억되는 반복의 구조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는 여러 세대와 여러 나라의 다양한 취향에 고루 호소력을 발휘하며, 노래 수용에 적극적인 태도를 갖지 않은 대중들까지 빠르고 쉽게 끌어들여, 최대의 이윤을 창출하도록 잘 계산되고 다듬어져 있다. 이러한 케이팝들은 산업과 비즈니스 기술의 향상과 대중가요의 다양성과 창의성 약화라는 발전과 퇴보 양면의 모습을 모두 보여준다. 2012년에 이르러 케이팝을 이끄는 걸그룹들이 아시아를 넘어 미국과 서유럽 진출에 성공했고, 싸이의 「강남 스타일」은 한국대중가요사상 최초로 빌보드 순위 2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