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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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지명
삼한시대의 정치연맹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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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삼한시대의 정치연맹체.
내용

서기전 1세기∼서기 3세기경 한강(漢江) 유역으로부터 충청·전라도 지역에 분포되어 있던 여러 정치 집단의 통칭이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마한지역에 위치한 54개 소국(小國)의 명칭이 열기되어 있는데, 큰 것은 1만여 가(家), 작은 것은 수천 가였다고 한다. 규모가 큰 나라의 지배자는 ‘신지(臣智)’, 작은 것은 ‘읍차(邑借)’라고 하였다.

3세기 전반 마한소국연맹체의 맹주는 목지국(目支國 : 《삼국지》에는 月支國으로 되어 있음)의 진왕(辰王)이었다. 마한을 형성한 주체에 대해서는 고예맥족(古濊貊族 : 개마족)이 남하한 선주(先住) 토착 집단이라는 견해도 있고, 북마한(北馬韓)이 남쪽으로 이주한 세력이라는 주장도 있다.

실제 마한지역 소국 중에는 백제국처럼 북방계 유이민의 정착을 계기로 하여 형성된 집단도 있고 초기 철기문화를 배경으로 대두되는 집단도 있어 그 형성 시기가 일정하지는 않은 듯하다. 그러나 마한지역에서는 경상도지역의 초기 철기시대(세형동검문화단계) 유물에 비하여 청동기 유물이 풍부하게 출토되고 있어 이 시대부터 대두되고 있던 선진적인 정치 집단의 존재를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고고학 자료를 놓고 볼 때, 마한지역 소국의 대부분은 서기전 3, 2세기 이래의 세형동검문화(細形銅劍文化)를 배경으로 대두된 다수의 정치 집단들이 지속적으로 성장 발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지역에서는 서기전 2세기경에 이미 대외적으로 통일된 기능을 발휘하는 세력 구심체가 형성되어, 한(漢)과 원거리 통교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결속 기반은 아직까지 무력을 배경으로 하는 지배·복속 관계나 마한 전역을 포괄하는 강력한 연맹체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 듯하다. 다만, 충남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일정 범위 내의 정치 집단들이 결속되어 마한지역의 주도세력으로 기능함에 따라 마한 소국 연맹체의 토대를 이루고 있었다.

철기가 유입되기까지 이들은 청동기의 제작과 교역을 통하여 중남부 각지의 세력집단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경기도 고양·용인, 충청남도 부여, 전라남도 영암 등지에서 각종 청동기 거푸집[鎔范]이 발견되어 청동기 제작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삼국지》 동이전 진한조(辰韓條)에서, 진(秦)의 유망민에게 동쪽 영역을 분할해 주었다는 기록에 나오는 마한과,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나오는 마한왕의 실체는 이 단계의 세력 구심체와 직접적인 계승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세형동검문화단계에서 형성된 마한 소국 간의 결속 관계는 서기전 1세기 이후 전개되는 정치·문화적 변동 속에서 그 성격이 달라지고 있다. 위씨조선(衛氏朝鮮) 유민의 남주와 한군현(漢郡縣) 설치로 인한 철기문화의 본격적인 확산, 경상도지역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교역 중심체의 대두 등으로 인해 마한 중심의 청동기 교역권은 약화되고, 마한지역의 영향력도 상대적으로 위축된 듯하다.

이후 3세기 전반, 위(魏)나라가 낙랑·대방군을 접수하고 한족(韓族)집단에 대해 적극적인 회유 정책을 전개함에 따라 목지국진왕 중심의 마한 소국 연맹체는 대군현 교섭에서 가장 우세한 세력 집단으로 기능하였다.

목지국의 위치는 충청남도 직산·성환·아산만 일대 또는 공주, 전라북도 익산 등지에 비정되고 있으나 확실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목지국이 언제부터 마한 소국 연맹체의 맹주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목지국의 진왕(辰王)은 스스로 왕이 될 수 없다는 《삼국지》의 기록으로 볼 때, 진왕의 지위는 무력으로 획득, 유지된 것이 아니라 소국 신지들의 선출에 의해 결정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삼국지》에는 진·변한 24국 중 12국이 목지국진왕에게 종속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진왕이 진·변한의 일부 지역에 대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중국 군현에 가까이 위치하고 있던 소국들이 보다 먼 남부 지역의 소국 집단들에 대하여 행사하고 있었던 일종의 영도권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한편, 목지국진왕을 백제의 왕으로 해석하여, 목지국의 위치를 인천 지역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온조집단(溫祚集團)의 한강 유역 이주를 계기로 마한 소국 연맹체 내부의 세력 판도 변화는 더욱 가속화된다. 백제국은 초기에는 토착 소국 연맹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마한왕에게 신록(神鹿)을 보내거나 전쟁 포로를 바치는 등 맹주국에 대한 우대의 격식을 취하였다.

그러나 점차 주위의 소국들을 병합하여 3세기 중반 이후에는 세력 범위를 한강 유역으로부터 충청남도지역까지 확대하면서 목지국진왕 중심의 조직체를 약화시키고 독자적인 세력권을 확립하게 된다.

이 때부터 백제국 중심의 소국 연맹체는 마한의 주도세력으로서, 3세기 중반 대방군(帶方郡)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여 태수(太守) 궁준(弓遵)을 전사시키거나, 3세기 후반 진(晉) 본국에 마한의 이름으로 사신을 파견하는 등 대외적으로 전개되는 정치·경제적 교섭 과정을 주관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백제국의 세력권에 포함되지 않은 남부 지역의 마한 소국들도 비록 세력권이 줄어들기는 했으나, 상당한 변화를 거치면서 4세기 후반 백제근초고왕에 의하여 병합되기까지, 종래의 기반을 토대로 독자적인 세력권을 유지하였다.

예를 들면, 3세기 말 신미국(新彌國)을 중심으로 한 남부 지역 20여 개의 마한 소국들이 독자적인 조직체를 형성하여 중국 진(晉)나라와 통교한 기록이 있다. 그러므로 백제가 마한 전역을 완전히 통합할 때까지 마한지역은 한강 유역의 백제국과 더불어 각 지역별, 시대별로 몇몇의 토착세력권이 병존했을 가능성이 높다. → 삼한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국지(三國志)』
『후한서(後漢書)』
『진서(晉書)』
『삼한사회형성과정연구』(이현혜, 일조각, 1984)
『한국 고대의 생산과 교역』(이현혜, 일조각, 1998)
「삼한의 국가형성 하」(천관우, 『한국학보』 3, 일지사, 1973)
「삼한문제의 연구」(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삼한의 성립과정」(천관우, 『사학연구』 26, 1976)
「마한제국의 위치시론」(천관우, 『동양학』 9, 1979)
「목지국고」(천관우, 『한국사연구』 24, 1979)
「마한소국의 형성에 대하여」(이현혜, 『역사학보』 92, 1981)
집필자
이현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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