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호는 본래 그가 통솔하여 다스리는 민호(民戶)의 수에 따라 만호·천호·백호 등으로 불리다가, 차차 민호의 수와 관계없이 진장(鎭將)의 품계와 직책 등으로 변하였다.
이것은 원나라의 제도에서 유래한 것으로 육군보다는 수군에 이 명칭이 남아 있었다. 고려 충렬왕 때 포도(捕盜)와 금란(禁亂)을 맡아보던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에 도만호(都萬戶)·만호·부만호(副萬戶) 등의 관직을 두었다. 이들은 순군부의 우두머리로서 순군을 통할하였다.
한편, 지방은 고종 때부터 왜구의 침범이 잦아지고 또한 원나라와 함께 일본 정벌을 목적으로 합포(合浦 : 지금의 마산)·전라(全羅)의 두 지역에 만호부를 두어 만호·천호 등으로 통솔하게 한 것이 처음이다.
그러나 일본 원정이 실패한 이후에도 탐라(耽羅)·서경(西京) 등을 비롯한 외적의 침입이 예상되는 연해(沿海)와 해도(海島) 지역에 만호부를 설치해 만호로 하여금 지휘, 감독하게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각 도별로 수군절제사에 의해 기선군(騎船軍 : 수군)이 통할되고, 영·진체제(營鎭體制)가 갖추어지면서 각 도의 요새수어처(要塞守禦處)별로 군사 조직이 편성되었다. 이에 따라, 고려 이래로 두어온 만호에게 외침 방어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또한, 조선 초기에는 북방족 등을 무마하기 위해 야인들에게 명예직으로서의 만호직을 수여해 각종 혜택을 주는 경우도 많았다. 초기의 만호는 3품관이었으며 부만호는 4품관이었다.
그러나 1458년(세조 4)에 영·진체제가 진관체제(鎭管體制)로 바뀌면서 각 도 연해안의 요충지(要害處)나 북방 내륙의 제진(諸鎭)에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만호·절제도위(節制都尉) 등을 두어 그 진을 다스리게 하였다.
동첨절제사와 절제도위 등은 대개 독진(獨鎭)이 아닌 경우에는 지방 수령이 겸했다. 그러나 만호만은 무장(武將)이 별도로 파견되어 사실상 일선 요충지의 전담 무장이 되었다.
≪경국대전≫에 법제화된 만호를 보면 경기도에 수군만호(水軍萬戶) 5인을 비롯해, 충청도 3인, 경상도 19인, 전라도 15인, 황해도 6인, 강원도 4인, 영안도(함경도) 3인과 평안도에 병마만호(兵馬萬戶) 4인이 있었다. 그 뒤 만호의 수는 제도의 변천 등으로 증감이 이루어졌다.
만호의 임기는 진에 가족을 데려가지 않는 경우 900일이었다. 이들은 대개 무예를 시험해 임명하되, 무과 합격자나 겸사복(兼司僕)·내금위(內禁衛)는 시험과 관계없이 임명되었다.
그리고 만호를 거친 자는 수령을 거치지 않아도 품계를 올려주었다. 지방 일선의 요충지에 배치되었던 만호제는 뒤에 진관체제가 무너지면서 여러 가지 폐단이 야기되었다. →만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