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선사(修禪社) 16국사(國師) 중 제3세 국사이다.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몇 군데 언급된 부분적 기록을 통하여 그의 행적을 살펴 보면, 수선사 제3세로 활약한 시기는 스승 혜심(慧諶)이 입적한 1234년(고종 21)부터 그가 입적하기까지의 18년간으로 추정된다.
이때의 고려 불교는 거란과 몽고의 침략으로 기복불교(祈福佛敎)가 크게 성행하였던 시기로서, 궁중에서는 거의 매월 복을 비는 여러가지 도량(道場)이 열렸고, 황룡사구층탑이 몽고에 의하여 불타는 등 침체일로에 있었다.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 수선사를 맡아 지눌(知訥)에 의해서 선양된 선풍(禪風)을 크게 진작시켰다.
또한, 스승 혜심의 비를 세우고, 혜심의 『선문염송(禪門拈頌)』을 열람한 뒤 거기에 347칙(則)을 첨가하여 보완하는 등, 참신한 선풍을 잇게 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리고 당대의 법왕으로 추앙받으면서 혼원(混元)·천영(天英) 등의 제자를 배출하였다. 1252년 수선사 사주직(社主職)을 제4세 혼원에게 물려주고 입적하였다.
당대의 문호인 이규보(李奎報)와 자주 교유하였다. 언제인가 시자(侍者) 두 사람을 이규보에게 보내어 정이안(丁而安)의 흑죽(黑竹) 그림을 구하매 이규보가 흑죽 2간(幹) 그림을 보내면서 찬한 글이 『동문선』 권51에 전하고 있다. 이규보가 몽여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몽여가 선사와 대선사의 승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시호는 청진국사(淸眞國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