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태수 ()

근대사
인물
대한제국기 때, 13도연합의병부대의 호남창의대장으로 활약한 의병장.
이칭
이칭
문태현(文泰鉉), 문태서(文泰瑞)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0년(고종 17)
사망 연도
1913년
본관
창원(昌原)
출생지
경상남도 안의
관련 사건
정미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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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대한제국기 때, 13도연합의병부대의 호남창의대장으로 활약한 의병장.
개설

본관은 창원(昌原). 본명은 문태현(文泰鉉), 별명은 문태서(文泰瑞), 문태수는 의병장 시절의 이름이다. 경상남도 안의 출신.

생애 및 활동사항

일찍이 군문에 들어가 1907년 하사에 이르렀다. 1907년 정미조약이 체결된 뒤 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무주(茂朱)에서 의거, 덕유산을 근거로 영남·호남·호서 일대에서 의병대장으로 활약하였다.

1907년 9월 ‘대한관동 창의장 이인영(李麟榮)’의 이름으로 격문이 발하여지자 각도 대표들과 출진, 호남창의대장에 임명되어 13도연합의병부대 일진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인영의 아버지가 사망하여 서울 진격계획이 좌절되자, 의병을 이끌고 본래의 근거지로 복귀하였다. 1908년 2월 28일 약 60명의 의병을 인솔하고 무주주재소를 습격하여 교전중 붙잡혔으나 탈출하였다.

4월 10일 신명선(申明善)의 의진과 합세, 의병 100명을 인솔하고 장수읍을 습격하였다. 마침 주재소 안에는 모두 의병토벌전에 동원되고 한인 한 사람만 남아 있어, 거침없이 무기 등을 빼앗은 뒤 학교·군청과 부속건물, 민가 13동을 태우고 무주 방면으로 퇴진하였다. 4월 24일 용담군 이동면 장전리를 습격하고, 5월 8일 남원의 이문성(里文城) 동북방에서 100여 명의 의병으로 일본 헌병과 교전하였다.

8월에 충청북도의 영동·청산·옥천 등지로 이동하며 활동하였다. 10월 30일 경부선 이원역(伊院驛)을 습격, 불을 지르고 일본인 3명을 납치하였다. 11월 이후 무주군을 근거로 금산·영동·옥천·상주·청주·보은 등지에서 활동하다 일본 경찰의 밀정과 격투 끝에 부상을 입고 붙잡혀 대구감옥에서 숨졌다. 일설에는 일본 히로시마[廣島]에서 사형을 당하였다고도 한다.

상훈과 추모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매천야록(梅泉野錄)』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독립운동사자료집』 3(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독립운동사』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애국동지원호회,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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