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함양(咸陽). 아버지는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 박자안(朴子安)이다.
1402년(태종 2) 전농시정(典農寺正)이 되고, 남포진병마사(藍浦鎭兵馬使)·용기사첨절제사(龍騎司僉節制使)를 거쳐 1414년 예조참의(禮曹參議)가 되었는데, 그 해 왕의 특명으로 전라도 진포(鎭浦)로부터 고만량(高巒梁)까지 수로의 험저여부와 황곡포(黃谷浦) 등지의 조운(漕運: 조세를 운반하던 제도) 가능여부, 그리고 전라도 용안에서 충청도 내포(內浦)로 육운이 쉬운지의 여부를 면밀히 살피고 돌아왔다. 1417년 경상도수군도절제사, 이듬해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중군총제(中軍摠制)를 역임하고, 이어서 1419년(세종 1) 대마도정벌에 좌군도절제사로 참가하였다. 정벌에서 돌아와 판홍주목사(判洪州牧使)·우군총제를 역임하고, 1424년(세종 6) 도총제가 되어 그 해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26년 전라도수군처치사(全羅道水軍處置使)가 되어 서해안에 출몰한 왜선을 격파하고 왜적 17급(級)을 베어, 그 공으로 어의(御衣) 한 벌을 하사받았다. 1428년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본래 학술이나 무예에 뛰어나지 않았으나 참형(斬刑)을 당하게 된 아버지의 구명운동을 극진하게 전개하자 이를 가상하게 여긴 태종이 금려(禁旅: 근위병)로 채용, 벼슬길에 올랐다. 박실이 죽자 세종은 2일간 철시를 명하고 치제(致祭)하였다. 시호는 정효(靖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