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창방(昌邦), 호는 육봉(六峰). 광주(光州) 출신. 박광리(朴光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박소(朴蘇)이고, 아버지는 진사 박지흥(朴智興)이며, 어머니는 서종하(徐宗夏)의 딸이다.
1507년(중종 2)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해 진사가 되고, 1510년(중종 5)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로 등용되어 곧 전적(典籍)이 되었다. 그 해 흥덕현감으로 나갔다가 얼마 뒤에 어머니 상을 당해 사직하였다.
삼년상이 끝나자, 다시 전적으로 복직하고 이어서 호조정랑을 거쳐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가 되었다. 경연에서 고금 제왕들의 치란흥망(治亂興亡: 선정과 악정 및 부흥과 망함)에 관한 이유를 설파하니 모두 감탄하였다.
3년 뒤에 병으로 사임했다가 다시 공조정랑으로 복직하였다. 이어서 병조정랑·장령(掌令)·집의(執義)·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직제학(直提學)·좌승지를 거쳐 강원도관찰사가 되어 스스로 검약을 지켜 지방관들에게 모범을 보였다.
김안로(金安老)가 권세를 부리면서 바른 선비들을 배척하자 스스로 원해 남원부사가 되었다. 그 때 권세가 허확(許確)이 전주부윤으로 내려왔으나 찾아가 인사하지 않았다. 허확과 그의 아들 허항(許沆) 등이 몇 번 초청하므로 마지못해 잠시 찾아보고 곧 돌아와 버렸다.
병으로 벼슬을 사직하고 나주 옛집으로 내려가서 2년을 지냈다. 다시 도승지로 복직했다가 곧 대사헌이 되었다. 그 때 허항이 전날의 감정으로 모함해 공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곧 파직을 당하였다.
그로부터 2년 뒤에 다시 병조참의로 복직되니, 허항이 또 모함을 해 해주목사로 좌천되었다. 그곳에서 선정을 베풀고 백성들을 교화해 왕이 옷감을 내려 포상하였다.
그 뒤 대사성·병조참의·이조참의·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개성유수가 되었다가 인종 때 한성부좌윤 겸 동지춘추관사가 되어 『중종실록(中宗實錄)』의 편찬을 감수하였다. 명종 때에 전주부윤이 되었다.
성품이 곧아 윗사람에게 아첨하지 않았으므로 당시 세도가인 김안로나 허확의 부자들로부터 심한 박대를 받았다. 그러나 끝내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