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성집(聖執). 서울 출신. 박홍수(朴弘壽)의 아들이다.
1869년(고종 6) 진사로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73년 수찬(修撰)이 되어 대원군의 하야와 고종의 친정(親政)을 요구하는 최익현(崔益鉉)의 상소와 관련하여 사의를 표명한 홍문관의 연명으로 올린 차자(箚子)에 참여하였다.
이듬해도 대원군의 복권을 상소한 부사과(副司果) 이휘림(李彙林)의 국문(鞠問)을 요구하는 옥당의 연차에도 참가하였다. 같은 해 부교리(副校理)에 임명된 뒤 김옥균(金玉均) 등과 함께 손영로(孫永老)사건, 신철균(申哲均) 사건 등의 처벌 강화를 주장하는 옥당의 연차에 계속 참여하였다.
1877년 부응교(副應敎), 이듬해 장령(掌令)이 되는 등 언론을 담당하여 활동하였다. 1880년에는 부묘도감(祔廟都監)의 부향친제시(祔享親祭時) 도청(都廳)에 참가하여 가자(加資)되었다.
1882년 안변부사로 재직할 당시 일본인이 조약을 어기고 개항장 밖으로 월경(越境)하여 조선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도한 행위를 하여 군중에게 난타당하고 그 중 1인이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함경감사와 남병사(南兵使)가 장계를 올리자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에서 책임을 물어 덕원부사 정학묵(鄭學默)과 함께 처벌받았다. 1885년에는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왕명을 어긴 죄목으로 숙천부(肅川府)에 유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