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처륜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병조좌랑, 형조좌랑, 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거경(巨卿)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45년(세종 27)
사망 연도
1502년(연산군 8)
본관
고령(高靈)
주요 관직
병조좌랑|형조좌랑|사헌부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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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병조좌랑, 형조좌랑, 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거경(巨卿). 할아버지는 박미생(朴美生)이고, 아버지는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박사란(朴思爛)이며, 어머니는 군사(郡事) 유한(柳閑)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70년(성종 1)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문관에 들어가 검열(檢閱)이 되고, 경연전경(經筵典經)·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를 겸하면서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수찬관(修撰官)으로 『세종실록(世宗實錄)』·『예종실록(睿宗實錄)』을 편찬하였다.

그 뒤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승문원검교(承文院檢校)를 거쳐 병조·형조의 좌랑으로부터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및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을 지냈다. 1489년 왕이 장차 중용할 목적으로 남양부사로 보냈을 때는 선정으로 백성을 자식과 같이 사랑하며 권농과 학교를 일으킴으로써 남양고을에 많은 선비가 배출되는 등 치적을 올렸다.

과만(瓜滿: 임기 만료) 후에 봉사시부정(奉常寺副正) 및 사간이 되었는데 남양고을 백성들이 남양부사 때의 치적을 들어 진정하므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1494년(성종 25) 관압사(管押使)로 연경(燕京)에 갔다가 돌아와 대사간이 되고,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지제교(知製敎)를 역임하였다. 형조참의를 거쳐 전라관찰사로 임명되어 선정으로 그 이름이 높았다. 다음 해 신병으로 돌아와 첨지중추부사로 있었다. 대부(大夫)가 되었으나 가산을 돌보지 않았고 효우(孝友)가 돈독하였다.

참고문헌

『성종실록(成宗實錄)』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국조방목(國朝榜目)』
『모재집(慕齋集)』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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