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직산(稷山). 자는 화보(和父), 호는 담암(淡庵). 아버지는 부사 백견(白堅)이다.
충숙왕(忠肅王) 때 문과에 급제, 춘추검열(春秋檢閱)을 거쳐 우상시(右常侍)에 이르렀다. 공민왕(恭愍王) 초에 전리판서(典理判書)로 있으면서 과거에 10과를 둘 것을 주청하였다.
뒤에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었고, 1363년(공민왕 12) 앞서 일어났던 홍건적의 난으로 사국(史局)의 사초(史草)와 실록이 대부분 없어져, 청주에 머물러 있던 공민왕이 공봉(供奉) 곽추(郭樞)를 시켜 남은 책을 해인사(海印寺)에 옮기도록 명하자, 개경에 있던 백문보는 김희조(金希祖)와 더불어 난리가 겨우 수습된 마당에 국사(國史)를 옮기면 민심이 동요될 것이라 하여 곽추를 만류하고 뒤의 명령을 기다리게 하였다.
뒤에 신라시대의 숭불(崇佛)이 나라에 미친 폐단을 시정할 것을 상소하였다. 공민왕의 환도(還都) 후 환안도감(還安都監)이 설치되어 김경직(金敬直)과 함께 그 일을 주관하게 되자 해인사의 『삼례도(三禮圖)』와 『두우통전(杜佑通典)』을 가져오게 하여 『두우통전』을 본뜨고 또 박충(朴忠)의 말을 추려서 의제(儀制)를 만들었다.
1373년 우왕(禑王)이 대군이 되어 취학하자 전녹생(田祿生)·정추(鄭樞)와 함께 그의 사부(師傅)가 되었고,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러 직산군(稷山君)에 봉해졌다. 이제현(李齊賢)·이달충(李達衷)과 함께 고려의 국사를 찬할 때, 백문보는 예종(睿宗)과 인종(仁宗)의 양조(兩朝)를 초(草)하였다. 성품이 청렴결백하고 정직하며 이단에 의혹되지 않고 문장에 뛰어났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