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강당사(講堂寺)’라고도 불렸다. 이 사찰은 백제시대 이래의 고찰(古刹)임에도 불구하고 그 역사를 알 수 있는 사지(寺誌)나 사적기(事蹟記) 등의 문헌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이다.
창건연대는 이 사지(寺址)에서 출토된 금동여래입상이 6C중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아마 6C중엽에 창건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이러한 사실은 이 사지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서산마애삼존불이 백제의 대표적 불교조각이라는 점, 당시 서산 지역이 중국과의 중요한 교통로였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비록 이 사찰의 사지나 사적기는 전하지 않지만 최치원이 남긴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이나 현재 사지에 남아있는 「법인국사보승탑비(法印國師寶乘塔碑)」의 명문을 통해서 그 종파나 사세(寺勢)에 대한 간략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웅주(熊州) 가야협(伽耶峽)의 보원사는 의상(義湘)을 계승한 화엄십사(華嚴十寺)중의 하나라고 언급되어 있다. 따라서 이 사찰의 종파가 화엄종임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의 이 사찰에 대한 내용은 법인국사 탄문(坦文, 900∼975)과 관련된 내용이다. 비문에 의하면 탄문은 장의산사(藏義山寺)의 신엄(信嚴)에게 화엄경을 배우고 15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그 계행이 매우 높아 고려 태조가 별화상(別和尙)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는 이 후 태조(太祖) · 혜종(惠宗) · 정종(定宗) · 광종(光宗)대를 거치면서 왕실과 두터운 인연을 맺었다. 혜종과 정종은 그를 지극히 공경하였고 광종을 그를 왕사(王師)로 봉하여 귀법사(歸法寺)에 머무르게 하였다. 고려 초기에 화엄종이 왕권강화를 위한 이념을 제공하였고 그 결과 화엄종 사찰이 크게 번성하였다.
당시를 대표하던 탄문이 보원사에서 머물렀고 975년 국사(國師)로 책봉된 후 이 사찰에 살다가 입적하였다는 사실로 볼 때 고려 초기에 이 사찰의 사세(寺勢)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사찰은 아마도 화엄종의 쇠퇴와 함께 무신집권기인 고려 후반기 이후 점차 사세가 기울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초기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불우(佛宇)조에 간략한 기록이 남아 있어 이때까지도 이 사찰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 광해군 때 편찬된 『호산록(湖山錄)』에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정확한 폐사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1996년에 실시된 지표조사에 의해 가람배치가 어느 정도 밝혀졌는데 석교(石橋)를 지나 중문(中門), 석등(石燈), 석탑(石塔), 금당(金堂), 강당(講堂)과 승탑(僧塔)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금당과 강당 좌우로 회랑(回廊)이 배치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사지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금동여래입상(국립부여박물관 소장)과 고려시대에 제작된 철불좌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이 있으며, 현재 사지에는 일괄 1963년 보물로 지정된 석조와 당간지주, 오층 석탑, 978년작 법인국사보승탑과 법인국사탑비 등이 남아 있다. 보원사는 2005년 6월 복원하여 불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