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대구(大邱). 자는 준평(準平), 호는 풍석(楓石). 판서 서종옥(徐宗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제학 서명응(徐命膺)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서호수(徐浩修)이다. 어머니는 김덕균(金德均)의 딸이다. 당숙(堂叔) 서철수(徐澈修)에게 입양되었다.
1790년(정조 14)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외직으로 군수·관찰사를 거쳤다. 내직으로는 대교(待敎)·부제학·이조판서·우참찬을 거쳐 대제학에 이르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가학을 이어 특히 농학(農學)에 큰 업적을 남겼다.
35세에 순창군수로 있을 때 농서(農書)를 구하는 정조의 윤음(綸音)에 접하고, 도 단위로 농학자를 한 사람씩 두어 각기 그 지방의 농업 기술을 조사, 연구하여 보고하게 한 다음, 그것을 토대로 내각에서 전국적인 농서로 정리, 편찬하도록 하자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 제안이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정조의 윤음으로 가학이기도 한 농학을 체계화시킬 필요성을 느끼게 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서유구의 농학은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로 집대성되지만, 그 이전에도 기초적 연구로서 농업 기술과 농지 경영을 주로 다룬 『행포지(杏浦志)』, 농업 경영과 유통 경제의 관련에 초점을 둔 『금화경독기(金華耕讀記)』, 농업 정책에 관한 『경계책(經界策)』 등을 저술하였다.
이러한 연구를 토대로 아버지의 『해동농서(海東農書)』, 할아버지의 『고사신서(攷事新書)』의 농포문(農圃門), 그리고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과농소초(課農小抄)』·『북학의(北學議)』·『농가집성(農家集成)』·『색경(穡經)』 등 여러 국내 농서와 중국 문헌 등 800여 종을 참조하여 만년에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를 완성하였다.
1834년에 전라감사로 있으면서 때마침 흉년을 당한 이 고장 농민의 구황을 위해 구황 식물인 고구마 보급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도록 강필리(姜必履)의 『감저보(甘藷譜)』, 김장순(金長淳)의 『감저신보(甘藷新譜)』 등과 중국·일본의 관계 농서를 참고하여 『종저보(種藷譜)』를 써서 보급하였다.
저술로는 이 밖에도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경솔지(鶊蟀志)』·『옹치지(饔치志)』·『누판고(鏤板考)』 등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