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공업 ()

유기장 / 달군질
유기장 / 달군질
산업
개념
사람이 손발 등 육신으로 원료나 자재를 가공하여 제품을 생산하는 작은 규모의 산업. 공업.
내용 요약

수공업은 사람이 손발 등 육신으로 원료나 자재를 가공하여 제품을 생산하는 작은 규모의 산업이다. 원시시대에 스스로 소비하기 위해 토기·피륙·청동기 등을 만들다가 수공업으로 분화되어 나갔다. 수요가 늘고 숙련된 기능인인 장인이 등장하여 전문적으로 생산을 하면서 전업 수공업이 발전했다. 삼국시대 이후 관부와 지배층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관영 수공업이 다양하게 발달했고 일제강점기에는 소멸의 운명을 맞기도 했다. 광복 후 다시 발흥하는 과정을 거쳤으나 현대에는 대규모 공업의 발전에 따라 위축되어 제한된 영역에서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정의
사람이 손발 등 육신으로 원료나 자재를 가공하여 제품을 생산하는 작은 규모의 산업. 공업.
개관

수공업에는 손발이 직접 노동대상물에 작동할 경우와 일정한 도구를 이용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기계를 사용하는 일은 여기에서 제외된다.

그러므로 서술의 시간적 대상은 우리 민족이 이 땅에 정착하기 시작한 원시사회로부터 최근 산업사회가 이루어지기까지 오랜 기간이다. 원시사회에서는 미분화된 형태로 수렵 · 어로 등 채취경제생활을 하였으나, 점차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도구를 만들어 쓰게 되었다.

초기에는 스스로 소비하기 위해 직접 도구를 만들었으나, 점차 분화되어 주문생산의 단계에 이르러 전업적인 수공업이 발달하였고, 시장이 발달함에 따라 상품생산의 단계까지 이르기도 하였으나, 현재는 대규모공업의 발달에 따라 수공업은 상대적으로 비중이 작아졌다.

그런데 그 종류는 이루 셀 수조차 없을 만큼 많다. 따라서 이를 빠짐없이 기술하기란 불가능하므로 먼저 이를 시대별로 몇 단계로 나누고 종류별로 질그릇 · 직물 · 놋쇠 · 쇠 등 중요한 부문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이들 부문은 그 생산에 있어서 특히 높은 수준의 숙달된 기술이 필요할 뿐더러, 제품의 유통과 수요에 있어서 우리의 역사발전에 한결같이 커다란 구실을 다했기 때문이다.

원시사회

고고학적 발굴보고에 따르면 전곡리(全谷里)라든지 평양시 상원검은모루유적에는 60만∼40만년 전에 해당하는 구석기시대에 이미 우리 선조들이 살고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거기서 발굴된 도구들은 돌이나 막대, 동물의 뼈, 조개껍질 따위를 가장 원시적인 방법으로 내리쳐서 만든 것이므로 그것을 수공업으로서 자세히 논할 겨를이 없다. 시대가 훨씬 흘러간 신석기시대인 기원전 5000∼3000년경에는 사람들이 돌을 갈아서 도구를 만드는 기법을 터득하였다.

그 질이 단단한 돌로 칼 · 도끼 · 창 · 낫 · 괭이 · 활촉 따위를 만들어 수렵이나 농업생산에 이용하기도 하고 맹수나 외적을 막는 데도 사용하고 있던 중 흙을 빚어서 토기를 만드는 기법을 터득하기에 이르렀다.

돌로 여러 가지 도구를 지어낸다든지 질흙을 빚고 높은 열을 이용하여 토기를 만드는 등의 수공업은 두 가지의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하나는 그러한 생산도구를 사용할 경우 그 이전단계에 비해 사회적 생산력이 획기적으로 높아짐으로써 한층 더 높고 새로운 사회관계를 형성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도구를 전업적으로 제작하는 숙련된 전문적 기능인인 장인(匠人)이 등장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토기

고고학적 발굴조사보고에 따르면 기원전 40∼25세기에는 이미 우리 선조들이 여러 가지 토기를 구워 그릇을 사용했다고 한다. 출토된 유물로 살펴보면 그것을 짓는 방법은 다음 세 가지이다.

첫째, 손짓기는 질흙덩어리를 그냥 손으로 펼쳐 늘여서 보시기 · 대접 · 식기 따위와 같은 작은 그릇을 만드는 데 흔히 쓰이는 방법으로 이것을 빚기 또는 수날법이라고도 한다.

둘째, 서리기는 잘 이긴 질흙을 먼저 가는 떡가래처럼 비벼 그릇의 밑으로부터 차례로 서려 올려서 그릇 형태를 짓는 방법인데, 항아리 단지 따위를 만들 때 이 방법을 흔히 쓴다. 이것을 권적법(卷積法)이라고도 한다.

셋째, 테쌓기는 질흙을 얇은 원통형으로 만들어 이를 서로 맞붙여 올려 짓는 방법인데 독이나 큰 항아리를 만들 때 이 방법을 쓰며, 윤적법(輪積法)이라고도 한다.

이 세 가지 방법은 물레를 사용하지 않을 당시의 일이지만 요즈음에도 도예계에서 더러 이렇게 도자기를 만드는 경우도 있다.

그 당시에는 토기를 굽는 가마시설이 없었으므로 기술은 원시적이었다. 그냥 바람이 잘 통하도록 오목하게 파낸 자리에 토기를 쌓고 장작불로 굽기 때문에 강도가 약하고 그릇 표면에 드문드문 얼룩진 곳이 있다. 그렇지만 표면에다 여러 가지 무늬를 놓아 심미감을 북돋우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그릇의 종류와 만든 시대에 따라서 무늬가 일정하지는 않지만 점선 · 새끼(타레) · 번개 · 물결 · 전나무잎무늬 등 여러 가지가 그것이다.

이러한 토기들은 당시 사람들의 생활을 아주 윤택하게 만들었다. 종전에는 날 것을 그대로 먹거나 구워서 먹다가 이제는 삶거나 쪄서 음식물을 연하게 조리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물이나 음식물을 담기도 하고, 의식주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오래도록 저장할 수 있게 하여 사회관계를 놀랄 만큼 변혁시켰다.

길쌈

우리 나라에서 식물이나 동물에서 얻은 원자재를 가공하여 실을 뽑고 피륙을 짜 의생활을 영위하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시대 말기인 기원전 2000년 전후로 추산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 많은 사람들의 의류는 털이 달린 동물의 가죽이나 나무껍질 · 마른풀 따위를 대략 엮어서 몸을 가리고 찬바람을 막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피륙은 석기 · 토기나 청동기 따위와 달리 쉽게 부식하므로 무덤에 부장된다 하더라도 오랜 세월이 지나는 사이에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음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신석기시대의 사회생활양식에 비추어 그 효시를 그렇게 유추하고 있을 따름이다. 기록에 따르면, 우리 나라에서의 길쌈에 관한 기사는 기원전 3, 2세기에 등장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 변진전 · 예전에 따르면 “뽕나무를 재배하여 누에를 치고 겸포를 짜다.”, “마한 사람들은 누에를 치며 명주와 삼베를 짤 줄 알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당시 또는 그 이전부터 우리 선조들이 동물이나 식물에서 얻은 원료를 이용하여 길쌈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떻게 실을 뽑고 피륙을 짰는지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 길이 없지만, 출토유물에 따르면 신라 중기인 4, 5세기 이전부터 명주나 삼베를 오늘날과 거의 같은 방법으로 짜낸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명주나 삼베가 생산되기 시작하여 상류사회 사람들에게 수요되기에 이르면, 일반 민중에게도 그러한 의생활이 급속하게 전파될 수 있다.

왜냐하면 삼이나 뽕나무는 놋쇠의 원자재처럼 공급이 한정된 희소재가 아닌 데다 그것을 가공하는 기술도 놋쇠나 토기와는 달리 시설장비라든지 생산기술을 갖추기가 상대적으로 쉽기 때문이다.

이것은 화력을 이용하는 점일처럼 그리 높은 기술을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므로 세계적으로 솜씨가 뛰어난 우리 나라 부녀자들의 집안노동에 비교적 알맞았다.

그러므로 피륙의 수요가 늘수록 삼베나 명주의 생산도 늘었다. 기원전 4, 3세기에는 나라 안 사람들이 한결같이 베나 모시 · 갈포 또는 명주로 만든 옷을 입게 된 것이 분명하다.

다만 모시나 명주 · 삼베 중 섬세한 것은 귀족들이 전용하고, 성긴 것은 주로 일반 민중들이 썼으며, 쓰고 남은 것은 국내외에서 교역하기도 하였다.

청동기

청동기는 놋쇠라고도 불려진다. 고고학적 연구결과에 따르면 우리 나라에서는 기원전 10세기경부터 놋쇠문화가 꽃피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 발굴된 청동기 출토 유적지는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1967년 대전시 괴정동에서 기원전 4세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돌무덤[石廓墓]을 발굴했는데, 거기서 놋쇠말과 그릇뚜껑 각 1점, 놋쇠거울 · 방울 · 방패 각 2점이 출토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1976년에는 충청남도 아산군 신창면 남성리에서도 기원전 4,3세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 돌무덤에서 놋쇠로 만든 칼 9점, 거울 2점, 칼자루 3점, 도끼와 이름 모를 놋쇠붙이 각 1점이 발굴되어 역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평양시 금판리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의 한 주거지에서, 그리고 평안북도 용천군 신암리유적에서도 청동기시대의 특징적인 석기와 토기 등이 많은 다른 유물과 함께 발굴되었다.

이러한 고고학적 발굴성과는 지금도 계속 발표되고 있다.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대곡리, 경상남도 창원군 진동면 진동리, 경상북도 경산시 임당동 옛무덤 등이 그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 나라의 청동기시대문화가 바로 신석기시대의 그것을 승계하여 반도 전역에서 그 문화를 꽃피웠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다. 그런데 당시 청동기의 주원료인 구리와 주석을 어떻게 조달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대륙에서 들여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토기 원료인 질흙이나 길쌈 원료인 누에고치 또는 삼과는 달리 채광과 제련기술이 있어야 하고 천혜적으로 풍부한 매장량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과학기술적으로 청동기 유물을 분석한 바에 따르면 놋쇠는 구리 70∼90%에다 주석 10∼30%로 구성되어 있으며, 비율에 따라서 강도와 색깔이 서로 다르다.

청동기시대의 놋쇠에는 위의 주성분 외에 흔히 납 · 니켈 등 잡철이 섞여 있다. 놋쇠붙이를 짓는 방법은 그릇의 종류에 따라서 두 가지다.

하나는 놋쇠부질법인데 쇳물을 녹여 거푸집에 지어붓는 것으로서 주조(鑄造)라고도 한다. 다른 하나는 방짜법인데 놋쇠를 화덕에서 달구어 모루에 얹어놓고 망치로 두들겨 의도한 그릇을 만드는 것으로서 단야(鍛冶)라고도 한다.

신석기시대를 승계한 청동기시대에는 주로 전자인 놋쇠부질법으로 신석기시대 석기나 토기와 비슷한 모양의 여러 가지 도구와 생활자료를 만들어 그 소재가 희귀하기 때문에 귀족사회에서 전용하였다. 많은 출토품이 그들의 무덤에서 발굴됨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것을 몇 가지로 나누어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생산도구로서 괭이 · 호미 · 도끼 · 자귀 · 칼 · 가위 · 바늘 · 낚시 · 거푸집 따위가 있다. 둘째, 장신구로서 가락지 · 목걸이 · 팔찌 · 허리띠, 마구로서 안장 · 질마 · 재갈 · 방울 · 말신, 이기류로서 장도칼 · 큰칼 · 창 등이 있다. 셋째, 생활자료로서 보시기 · 식기 · 대접 · 제기 · 바라 · 거울 · 솥 · 항아리 · 동이 등이 출토되었다.

그 제작법을 살피건대 대부분은 부질법으로서 거푸집에 지어부어 만들었다. 전라남도 영암고분에서 발굴된 도끼와 낚시바늘의 거푸집과 북한지방에서 발굴된 자료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어쨌든 당시 유일한 귀금속이 놋쇠이고, 놋쇠로 만든 각종 도구와 이기류는 석기나 토기와 비교할 때 사회적 생산력이 획기적으로 높아졌다. 더욱이 그러한 장신구와 생활자료를 갖춘 개인이나 씨족 · 부족은 이것을 사적으로 소유하여 그것을 갖지 못한 많은 사람들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은 시일이 지날수록 더욱 심하게 나타나서 드디어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청동기를 생산하는 기술과 제생산력은 곧 철기의 생산방법과 직결되면서 원시사회는 마침내 한 단계 높은 고대사회로 변혁되기에 이른다.

고대사회

고대사회라 함은 수공업 측면에서 쇠를 일반적으로 생산하여 사용하기 시작한 기원전 4, 3세기부터 삼국이 통일된 7세기까지를 말한다.

우리 나라에서 고대의 시발과 종말에 관해서 여러 갈래의 설이 있으나 여기서는 그 논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밝혀둔다. 다만 수공업생산과의 여러 관계를 서술의 편의상 이렇게 구분하여 설명할 따름이다.

고대 수공업 중 중요한 몇 가지만을 역사적으로 살피기로 한다. 고대국가의 관영수공업은 관부와 지배계층의 다양한 수요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발달하였고, 농촌수공업은 자가수요와 조세수납을 위해 발달하였다.

백제의 경우 무기의 제조를 관장하는 도부(刀部), 금속제품의 제조를 관장하는 사공부(司空部), 직조(織造)를 관장하는 주부(綢部) 등 관영수공업조직이 있었다.

신라의 경우 고급직물의 제조를 관장하는 기전(綺典), 모직물의 제조를 관장하는 모전(毛典), 유기(柳器)나 죽세공품(竹細工品)의 제조를 관장하는 양전(楊典), 도기(陶器)나 기와의 제조를 관장하는 와기전(瓦器典) 등의 관영수공업조직이 있어 다양한 수공업제품을 생산하였다. 고대국가의 관영수공업은 직물 · 금속 · 도기부문이 특히 발달했다.

우리 나라에서 쇠를 처음으로 사용하게 됨에 따라서 커다란 변혁이 일어났다. 쇠를 사용함으로써 사회적 생산력이 전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전함에 따라서 사유재산제도가 확립되고 사람끼리 새로운 생산관계가 이루어진다.

쇠로 만든 철제이기를 소유한 개인이나 씨족의 생산력은 전 시대의 구리의 지배자보다 훨씬 더 우월하였다. 그것을 가진 이들은 못 가진 이들보다 월등하게 강력해진다.

따라서 철기를 소유한 소수는 지배계급으로서 그것을 못 가진 많은 사람들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소수의 지배계급은 토지라든지 생산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하고, 이전의 공동체 성원이었던 사람들을 이제는 마치 마소와 같은 재산으로 취급하였다.

이렇게 성립된 고대사회를 노예제사회라고 하는데, 우리 나라 등 동양의 여러 나라에서 이루어진 고대사회를 총체적 노예제라고도 한다.

고구려 · 백제 · 신라 등 3국이 건국된 것은 한반도의 철기생산력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대륙으로부터 한반도로 이주해온 사람들 중 고구려의 주몽(朱蒙), 백제의 온조(溫祚), 신라의 박혁거세(朴赫居世) · 석탈해(昔脫解) · 김알지(金閼智) 등과 그들의 선대 및 후손들 중에는 이 땅에서 먼저 철기를 소유하고 통괄한 지배씨족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는 문헌기록물 외에도 금세기에 들어와서 최근까지 발굴된 고고학적 출토품이다.

삼국의 수도 언저리에 보존된 방대한 시설물, 특히 대규모의 고분군과 그 안에서 드러난 부장품들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금 · 은 · 옥 · 유리 따위로 만든 숱한 보화도 막강한 고대국가의 국력 없이는 이루어질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것도 철기생산력이 밑받침됨으로써 가능하였다.

출토된 철기류는 제작된 수법이라든지 종류와 용도에 있어서는 거의 청동기의 그것을 승계한 것이 분명하지만 다음 몇 가지는 특기할 일이다.

첫째, 철기는 채광으로부터 제련에 이르기까지 국내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진조(弁辰條)의 “나라에 쇠가 났다(國出鐵).”는 기사에서 밝혀진 것이지만, 그것은 오늘날의 경상남도 울산시 울주구 농소면 달천리 달내쇠곳[達川鐵所]이 본산이다.

둘째, 시우쇠로 만든 낫 · 호미 · 괭이 · 보습 · 자귀 · 도끼 · 칼 · 창 · 갑옷 · 문고리 · 꺾쇠 등 많은 쇠붙이 중에는 도가니에서 쇳물을 녹여 거푸집에 지어부어 부질[鑄造]한 쇠붙이도 많지만 청동기의 경우와는 달리 쇠둑(용광로)에서 시우쇠를 달구어 모루 위에 얹어놓고 망치로 쳐서 방짜[鍛冶]한 것도 많다는 사실이다. 단단한 강철의 철제이기는 방짜기법을 통해서 비로소 생산될 수 있다는 데 역사적인 의의가 큰 것이다.

셋째, 부장된 쇠붙이 중에는 시우쇠 덩어리인 판장쇠[鐵錠]가 많다는 사실이다. 확인된 바에 따르면, 1921년에 발굴된 금관총의 출토품 5,000여 종중 판장쇠가 1,200㎏이며, 1973년에 발굴된 천마총의 출토품 4,000여 종중에는 그것이 421㎏이나 부장되어 있었다.

평안북도 영변군 세죽리에서 발굴된 주거지와 평안남도 강서군 태성리고분군에서도 기원전 3, 2세기 전의 철제농기구와 이기가 출토되었고, 백제와 가야의 고지에 있는 고분에서도 많은 쇠붙이가 출토되었다.

길쌈

삼국시대의 길쌈수공업도 청동기시대의 기법을 승계하여 더욱 승화되었다. 다만 그 생산과 수요방법이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졌다는 사실은 특기할 일이다. 하나는 일반 민중들이 스스로 삼베 · 모시 · 갈포 · 명주 따위를 투박하게 짜서 자급자족하였다는 사실이다.

삼베의 경우 날실이 1,600∼2,000올에 불과한 4, 5새가 고작이고, 명주의 경우에는 3,200∼4,000올인 8∼10새에 불과하여 아주 성기지만 질긴 것이 특징이다.

이 일은 부녀자들이 전담하며 그 습속은 통일신라 · 고려 · 조선까지 이어지면서 우리 민족의 의생활을 충족시켰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귀족들의 수요품인 섬세한 피륙이다. 귀족용 피륙 중 삼베나 모시는 8∼12새에 달하고, 명주의 경우 12∼15새에 이르는 섬세한 것이다. 이렇게 섬세하고 질이 좋은 것의 대부분과, 성기게 짠 일부는 공물로 수납되어 왕실과 귀족들의 수요에 충당된다.

삼국 말기에는 왕실 · 귀족의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삼베 · 모시 · 평직주 외에 능 · 나 · 사 · 단 등 비단과 그 밖에 모직물을 전문적으로 짜는 관영수공업소가 생겼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보다 확실한 실증적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토기와 놋쇠

청동기시대에도 석기와 토기가 더욱 광범하게 생산, 수요된 것처럼 철기시대에서도 토기 · 석기 · 청동기 따위가 더욱 높은 수준으로 생산되었다.

기원전 3, 2세기에 만들어진 토기는 물레를 사용한 흔적이 역력하고 표면에 처리된 무늬라든지 그릇의 모양도 세련되었을 뿐더러 가마의 온도가 매우 높아 그릇들이 아주 단단하고 날렵하였다.

이제 쇠망치와 예리한 정을 활용했는데 이름에 따라서 절구 · 구유 · 맷돌 등 온갖 석물을 만들 수가 있었고, 무쇠로 된 가래나 보습이 생산됨으로써 방대한 관개사업을 벌여 생산성이 높은 벼농사도 경영하기에 이르렀다.

토기 · 석기 · 놋쇠의 수공업은 직 · 간접으로 쇠붙이 수공업에 힘입어 더욱 발전하였다. 삼국과 가야의 토기수공업이 고도로 발전하였던 사실은 당시에 이루어진 귀족과 일반민중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방대한 부장품을 통해서 얼마든지 증명되었다.

그러나 놋쇠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전시대와 마찬가지로 몇 가지의 농기구를 제외한 많은 놋쇠붙이는 왕실과 소수 귀족의 전유물이었던 것 같다.

여기서 특기할 것은 분황사석탑 안에서 출토된 사리구 중 금바늘(길이 3.5㎝)과 은제 바늘집(길이 5.6㎝), 놋쇠로 된 가위(길이 7.5㎝) 등이다. 634년(선덕여왕 3) 분황사 창건 당시에 시납된 것으로 미루어 매우 희귀한 수공업품이다.

중세사회
근세사회

여기서 근세사회라 함은 17∼19세기의 300년 동안을 뜻한다. 그 시대가 오늘날에 가깝다는 뜻이라기보다 여러 가지 수공업의 경영방법이 중세사회의 그것과는 이질적이면서도 근대시민적인 성격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뜻이 강하게 함축되어 있다.

물론 기본적으로는 중앙집권적인 봉건체제가 온존하고 있지만 경제적 기초구조인 수공업 부문에 있어서의 많은 생산양식이 근대자본주의적인 성격을 띠기 시작하였다.

이윤을 추구하고자 하는 전주 또는 점주가 교환을 전제로 한 상품을 생산하고자 일정한 토지 위에 장비시설을 갖추고 원자재를 구입하는 한편, 일정한 임금을 지불하는 노동자를 고용하여 분업에 의한 협업체제를 통해 재화를 재생산하는, 생산방법이 수공업의 여러 부문에 싹터서 자라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여건이 마련된 한 가지 계기는 전통적인 각종 수공업 부문에 숙달된 기능적인 경영자와 장인이 잠재하였기 때문이고, 다른 또 한 가지 결정적인 계기는 17세기에 들어서면서 대동법이 실시되기 시작해 종래의 현물 노동지대인 공물과 요역이 원칙적으로 철폐됨에 따라서 모든 생산자계급에서 근대시민적인 이윤동기가 부여되었다는 사실이다.

대동법이 실시됨에 따라서 토지 1결에 대하여 일정량의 지조(地租) 외에 대동세로서 쌀 12말 또는 삼베 · 무명 2필 아니면 돈 6∼8냥 만을 수납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모든 생산자 계층을 획기적으로 자극하였다.

왜냐하면 이제야 그들은 법제적으로 한정된 실물화폐의 수납의무만을 완성한다면 원칙적으로 자유로운 경제활동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여건하에서 새로운 생산양식이 싹터서 자라나고 있었던 사실을 몇 가지 수공업경영 내부를 들추어 실증적으로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직물

무명과 삼베는 대동법이 실시된 이래 대동포로서 쌀 · 동전과 함께 실물화폐 구실을 하였다. 이에 따라서 삼베와 무명은 문자 그대로 화폐로 전환되었다.

따라서 17세기 후기 이래 그의 수요가 비약적으로 증대하였다. 수요가 증대함에 따라서 각종 직물은 주어진 입지조건에 따라서 특정지역으로 집중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를테면 18세기 후기에 이르러서는 삼베는 경상도 안동 · 의성지방, 명주는 상주 · 성주지방, 모시는 충청도 한산지방, 무명은 전라도 광산 · 나주지방에서 전업화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에 대응해서 그 원료인 삼 · 뽕나무 · 태모시 · 목화를 전업적으로 생산하는 농가가 생겨나고, 그들 중에는 원료를 직접생산자에게 미리 대여하였다가 그 완제품 또는 반제품을 절반씩 분배하는 ‘수넷베’라고 불리는 선대제수공업자(先貸制手工業者)도 등장하였다.

그리고 위의 각 지역의 몇몇 전주들은 커다란 작업장을 차려놓고 사람을 고용하여 시장에 내보낼 ‘장내기베’를 짜내었다.

거기서는 실을 전적으로 잣는 사람, 베를 날고 매는 사람, 짜는 사람 등 몇 가지 공정으로 분화되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한산모시와 안동포 생산에서 한층 뚜렷하게 나타났다.

말하자면 이러한 곳에서는 제사공정, 정경(精經), 가호(加糊), 직포 및 표백, 포장 등 4, 5개의 생산공정으로 나누어 분업에 의한 협업을 통해 공장제적수공업으로 경영하는 곳도 있었다는 것이다.

놋쇠

이 시기에 놋쇠수공업은 고도로 발전하였다. 그것은 대동법을 실시하여 많은 백성들에게 능동적인 생산의욕과 수요동기가 부여된 덕분이지만, 다음 두 가지 요인도 빠뜨려서는 안 된다.

하나는 오랜 전통을 승계한 높은 수준의 놋쇠기술자가 전국의 주요 고을에 집단적으로 살고 있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원료인 구리쇠를 대량으로 확보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사실이다.

얼마쯤의 원료는 1609년(광해군 1) 기유조약 이래 일본에서 대량으로 수입되었던 것이고 많은 양은 국내의 동점, 특히 함경도 갑산 동점에서 생산된 것으로 충당되었다. 이러한 여건들은 당시의 놋쇠수공업을 활성화시키는 일에 크게 기여하였다. 놋쇠수공업은 경영주체에 따라서 관영과 사영으로 구분된다.

관영놋쇠점

경영주체가 관인으로서 왕실이나 관가에서 쓸 그릇 · 도구 또는 동전 따위를 제작하는 곳이다. 이 시기의 관영놋쇠점에서는 소재화폐인 상평통보를 부질하여 만들었다.

1678년(숙종 4)부터 호조 · 상평청 · 진휼청 · 어영청 · 사복시 · 훈련도감 등 여러 중앙관사에서 상평통보를 발행하게 한다. 그 뒤 이것은 지방의 모든 감영과 중앙 그리고 지방의 몇몇 주요 관아에서도 발행하게 한다. 따라서 서울과 지방에는 엽전을 부질하는 대규모의 관영 동점이 경영된다.

1779년(정조 3) 서울에는 21인의 장인이 종사하는 50개의 작업장에 1,050인이 일하는 커다란 관영수공업장에서 상평통보를 부질하고 있었다.

그들은 우두머리 기술자인 도편수의 지휘감독을 받으면서 대량의 돈을 부질하였다. 그 때 남창에 보관되어 있는 왜동이 바닥날 정도로 원료가 달렸다. 한 작업장에서 하루에 부질할 수 있는 구리와 주석의 단위량을 1칭으로 하는 원자재가 2,000칭밖에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바닥이 났다.

그리고 연료인 소나무숯도 달렸으나 관인들이 스스로 조달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대상고(大商賈)에게 위탁하여 경영하기도 하였다. 작업장은 도편수의 감독 아래 21인의 장인들이 어떻게 작동했었는지는 상세하게 알 수는 없다.

사영놋쇠점

17세기 후기부터 사영놋쇠수공업은 놀랄 만큼 번창한다. 대동법실시 이래 일반민중들의 놋그릇 수요가 크게 늘어난 데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국내외에서 구리쇠 원료가 대량으로 공급된 탓이다.

이 시기의 크고 작은 사영놋쇠점은 경기도의 안성 · 개성 · 수원 · 광주 · 양주, 충청도의 충주 · 청주 · 공주 · 홍주, 전라도의 전주 · 남원 · 나주 · 장흥 · 순천, 경상도의 경주 · 상주 · 고령 · 안동 · 진주 · 김해 · 금산(김천), 강원도의 원주 · 강릉, 평안도의 평양 · 영변 · 안주 · 의주 · 정주 · 강개 · 숙천 등 여러 고을이다.

이들 대부분의 지역에는 조선 전기 외공장(外工匠)인 유장(鍮匠)이 있었던 고을로서 그들의 기능이 전수된 것으로 보인다. 이 수공업은 제작방법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놋쇠물을 녹여 거푸집에 지어 붓는 부질법과 놋쇠덩어리를 화덕에서 달구어 모루에 얹어놓고 망치로 두들겨 만드는 방짜법이 그것이다.

부질 놋쇠는 청동기시대 이래 널리 실시된 방법으로서 이 시기의 사영놋쇠점에서는 이 방법으로 식기 · 대접 · 보시기 · 칠첩반상기 · 화로 · 제기 · 불기 등 주로 민수용품을 만들어 팔았다. 가장 성가가 높고 대량으로 생산되었던 곳은 안성지방이다. 안성유기의 기법은 놋쇠 도편수 김근수(金根洙)에 의해 오늘날 계승되고 있다.

안성지방의 연로자 및 김근수 편수의 놋쇠점 경영방법을 위의 관영동전놋쇠점의 그것과 연계시켜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18세기 중기 이래 안성에는 전주인 도편수가 부질편수 · 거푸집편수 · 뒷불편수 · 가질편수 등 4인의 숙련기술자를 포함한 20인 내외의 일꾼을 들여 제품을 만들었다.

이러한 놋쇠공장이 한때는 40∼50채에 달하였다고 전한다. 부질편수는 도편수의 지시를 받고 자신의 책임 아래 구리와 주석을 정밀하게 가늠하여 도가니에 집어넣고, 쇳물이 알맞게 녹아나도록 숯쟁이와 풀무꾼을 지휘, 감독하는 일을 맡는다.

거푸집편수는 개토꾼을 지휘하면서 암수 향남틀 안에서 무집을 만들고 틀을 맞붙여 고정시키는 일을 맡는다. 부질편수의 조수격인 숙련공 뒷불편수는 집게로 쇳물이 든 도가니를 집어다 무집(주형)의 아가리(주구)에 부어넣는 부질공정을 전담한다.

가질편수는 자신의 책임하에 거푸집을 깨뜨려 굳은 그릇을 점검하고 가질틀에 그릇을 걸어 곱게 만들어 끝손질을 하는 가질공정을 전담한다. 고로들의 증언을 토대로 19세기 서울 통전놋쇠점과 안성놋쇠점의 생산공정은 21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유추된다.

방짜놋쇠

놋쇠를 달구어 망치로 두들겨 의도한 그릇을 만드는 방짜법도 청동기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수되고 있다. 바늘 · 가위 · 수저 등 간편한 생활도구 외에 주로 징 · 꽹과리 · 바라 · 대야 등 충격을 많이 받는 그릇을 만들 때 이 방법을 쓴다. 18, 19세기에는 평안북도 정주군 납청에서 방짜방법으로 온갖 놋쇠그릇을 만들어 그 성가가 매우 높았다.

‘납청양대’라고 하는 별칭까지 가진 납청방짜의 생산기법을 그대로 전수받은 도편수(납청지방에서는 도대장이라 함) 이주봉(李周鳳)은 경기도 안양시에 거주하면서 납청놋쇠점을 재현하고 있다. 도편수 김일웅(金一雄)은 김천시 황금동에서 방짜놋쇠점을 경영하고 있다.

두 곳에서 관찰, 조사한 바를 통해 납청양대의 생산공정을 살피건대 전주와 도편수의 역할이라든지 부질과 가질과정은 부질법과 동일하므로 중언을 피하고 여기서는 징이나 꽹과리를 방짜하는 작업공정만을 간추린다.

이 작업은 그릇(징)의 기틀잡기, 그릇짓기 및 울음잡기 등 크게 세 가지 공정으로 구분된다. 기틀잡기란 도편수 또는 뒷불편수의 지휘하에 놋쇠덩어리를 달구어 망치로 쳐서 그릇의 기본형을 만드는 작업이다.

여기에는 8∼11인의 망치꾼이라고 불리는 대장장이로 구성된 한두레가 빈틈없는 협업을 통하여 네핌질 · 가위질 · 우김질 등 세 가지 공정의 일을 맡는다.

그릇짓기란 의도한 그릇을 완성시키는 작업인데, 여기에는 싸게질 · 제질잡기 등 두 가지 공정의 일을 맡는다. 울음잡기란 징이나 꽹과리가 제대로 소리가 나도록 하기 위한 세심한 작업으로서 고도의 숙련과 정성이 들어야 한다.

우치놓기 · 손매놓기 · 풋마치놓기 · 담금질 · 벼름질 · 제울음잡기 등이 그것이다. 울음잡기는 말로써 표현하기 힘든 어떤 영험과 통하여야 할 만큼 노련한 장인정신을 지닌 편수가 맡는다.

그러므로 이 일만은 전적으로 울음편수가 맡는다. 울음을 제대로 잡지 못하면 완성된 징과 꽹과리가 아무리 휼륭한 모양을 갖추더라도 아무런 가치가 없다.

조선 후기에 있어서의 서울의 동전놋쇠점, 안성의 부질놋쇠점과 마찬가지로 납청의 방짜놋쇠점 등에서는 달품이나 날품을 지급하는 자유노동자를 고용하여 그것을 공장제수공업으로 경영하였다고 전한다.

쇠부질

17세기 후기 이래의 전반적인 사회의 변질과 발맞추어 쇠부질도 크게 번성한다. 쇠점에서 쇠부질하는 일도 철광석을 쇠둑(용광로)에서 고아 무쇠나 시우쇠를 녹여내는 쇠둑부질(제련)하거나 이를 다시 녹여 거푸집(경주지방에서는 바숨이라 함)에 지어부어 부질하는 무쇠부질 등 두 가지가 있다.

무쇠부질터에는 거푸집을 익히는 토둑간이 있는데 이것을 적집이라고도 한다. 이 시기의 쇠부질 경영방법은 전기적인 어용독점자본인 수철계공인(水鐵契貢人) 등이 운영하는 공인경영과 개인전주가 경영하는 일반민영 등 두 가지가 있다.

공인경영

17세기 후기부터 수철계공인들은 서울 강서에 자리잡은 수철리를 중심으로 사방 10리 지역에서 무쇠점을 차리고 사방 100리 안에서는 어떤 사람도 쇠점을 경영하지 못하게 하는 특권을 가진다.

그들은 또 서울 밖에 있는 모든 쇠점으로부터 푼세[分稅]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몰래 철물업을 경영하는 자를 다스릴 금난전권까지 확보하고 있다.

그 대가로 각 관사로부터 미리 넉넉한 공가를 받고 쇠붙이를 공급하는 의무를 진다. 수철리에는 많은 쇠점을 차려놓고 무쇠부질로 공납에 필요한 솥 · 화로 · 무기와 여러 가지 쇠붙이뿐만 아니라 일반민수용도 많이 만들어 판다.

공인의 우두머리가 경영책임을 맡은 여러 개의 쇠점에는 각 공정의 숙련기능공인 골편수 · 불편수 · 도래질편수 각 1인과 도합 40여 인씩의 풀무꾼 · 오리꾼 등 허드레꾼이 얽혀서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두머리 공인들은 쇠점경영 자체보다 쇠붙이의 상업적 이윤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므로 근대적인 철산업으로 승화하기에는 스스로 한계가 있었다.

일반민영무쇠부질

이 시기에는 역사적인 철산지와 연고가 있는 큰 산기슭에는 전국의 몇몇 곳에 크고 작은 쇠둑부질과 무쇠부질 수공업장이 번창한다.

철분이 70%쯤 들어 있는 토철이 대량으로 매장되어 있는 경상남도 울주군 달천리 달래쇠곳 주변과 토함산 치술령 운문산 기슭에는 17세기 후기부터 이루어진 18개의 쇠둑부질터와 37개의 무쇠부질터, 그리고 같은 곳에서 두 가지를 겸영한 27개의 쇠부질터 등 도합 82개가 1970년 전후에 발견되었다.

19세기에는 평안북도 개천의 운곡 · 천동 · 신현 · 부암 광산일대 및 그와 이웃한 용흥 · 오봉창골 · 원촌 · 봉창 등지에 크고 작은 50∼60개의 쇠붙이 작업장들이 흩어져 있었다.

19세기 말기 청도군 운문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말음, 신원리 마을 무쇠부질 쇠점에서는 전주 홍순영(洪淳榮)이 골편수 · 불편수 · 뒷불편수 등 3인의 숙련기능공과 풀무꾼 · 오리꾼 각 16인을 포함한 반숙련 허드레꾼 등 도합 41인을 달품 또는 날품으로 고용하여 대량의 솥 · 보습 등 민수용 쇠붙이를 생산하였다.

이때 전주는 거푸집을 만드는 숙련공인 도래질편수를 고용하기도 하고 자신의 향남틀과 도래를 이용하여 스스로 지은 거푸집을 사들여 쓰기도 하였다.

개천지방에서와 마찬가지로 운문산 기슭에서도 골작업 · 불작업 · 도래질작업 · 오리작업 등 각 공정을 분화하여 협업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생산물은 현장에서 솥장수 또는 직접 수요자에게 판매하여 거액의 초기 자본을 축적하였던 것이다.

백자기

조선 전기의 분청사기는 17세기 이래 자취를 감추고 백자기가 전국 곳곳에서 널리 등장한다. 이 시기의 백자 자기수공업은 경영주체에 따라서 관영과 사영 두 가지로 구분된다.

관영

왕실용 어용자기의 생산을 빌미로 하여 사옹원에서는 17세기 초부터 관권을 발동하여 경기도 광주에 관영사기점을 신설한다. 이것을 사옹원 광주분원이라고 한다.

주원료인 백토는 황해도 봉산, 경상도 진주 · 경주 등지에서, 연료인 장작은 강원도에서 공납하게 하고, 사기장은 전국 각지에서 선상하도록 강제한다. 사옹원은 관인을 현장에 파견하여 이른바 분원백자를 만드는 일을 직접 관리하였다.

분원은 조선 초기부터 설치되어 전국의 자기생산을 통괄하였다고 이해하는 이도 있으나 그것은 잘못이다. 임진왜란 때 우수한 우리 사기장들이 일본으로 납치된 데다 난후에 왕실용 도자기를 조달하는 방편으로 ≪경국대전≫의 ‘사옹원 사기장 380인’이라는 규정을 원용하여 8도의 사기장을 강제증발한 것이다.

자료에 따르면 광주군 우천을 중심으로 연료를 찾아서 좌우 산기슭으로 당초에는 매 10년을 시한으로 사기장을 다른 곳으로 옮겨다니다 1752년(영조 28)에는 오늘날의 분원리에 정착시킨다.

이 시기에 분원에는 일하는 운반잡역인을 포함한 552인의 사기장이 딸린 가족과 함께 수용되어 있었으며,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1677년(숙종 23)에는 흉년을 당한 데다 전염병이 휩쓸어 굶고 병들어 죽은 사람이 102인에 달한 적도 있다.

분원자기는 얕은 푸르름이 비칠 정도로 희고 우아하며, 청화의 그림을 그린 청화백자는 특히 왕실과 귀족들에게 애용된다. 임금이 쓸 그릇에 불길이 바로 닿지 않도록 내화도가 높은 질흙으로 빚은 갑을 씌워 굽기 때문에 그처럼 희고 영롱하다.

오늘날 흔히 ‘조선백자’라고 하면서 높이 상찬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 같이 분원자기의 생산은 사옹원에서 파견한 관원에 의해서 총괄되며, 생산기술적인 우두머리는 도편수이다.

그의 지휘하에 총원 108인의 사기장이 여섯 가지의 공정으로 분화되어 일했다. 꼬박편수가 지휘하는 흙이기는 일, 짓기편수가 관리하는 물레로 그릇을 짓는 일, 굽깎기편수가 감고 하는 굽을 깎아내는 일, 불편수가 책임지고 있는 초벌굽기나 두벌굽기 하는 일, 화원의 책임으로 그릇의 안팎에 조각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일, 그리고 초벌구운 그릇에 잿물편수가 도맡아서 잿물을 올리는 일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생산된 분원자기는 원칙적으로 송두리째 왕실과 관가로 실려간다.

도편수와 각 공정의 우두머리편수를 제외한 일반사기장과 허드레꾼들에게는 너무나 심한 부역노동이 강제되고 있었으므로 분원경영은 전기적 관영수공업의 표본이었다.

19세기의 말기에 이를수록 도토와 장작 등 원료공납이 줄어들고 사기장이 도주하였으므로 1874년(고종 11)에는 <분원자기공인절목>을 만들어 생산조직을 이전의 수철계공인경영처럼 정비하고 강화하였으나 그것이 유지될 까닭이 없다. 더욱이 나라가 일제에 강점됨에 따라서 분원은 폐쇄된다.

일반민영

공물제도가 원칙적으로 폐지된 17세기 후기 이래 일반 민영백자기수공업도 크게 번창하기 시작한다. 일반 민중들의 백자수요가 늘어남에 따라서 역사적으로 도자기업과 연고가 있고 도토와 연료자원이 풍부한 전국의 각 지방에서는 교환을 전제로 한 장내기의 눈배기백자를 만들어낸다.

비록 세련되지 못하고 투박스럽지만 생산자의 이윤동기와 수요자의 구매심리를 크게 자극하였기 때문이다. 이들 사기점 중에는 공장제수공업으로 발전한 곳도 많았다.

이를테면 가야산 동남서쪽 세 기슭에는 많은 눈배기사기점이 세워졌다. 가야면 구원동 일대에는 눈배기백자단지가 형성되었다. 이들 중 전주 민석로(閔錫魯) · 손병린(孫炳麟) 등은 여기서 사기점을 경영하였다.

토지와 자본 등 생산수단을 갖추고 많은 사기장을 고용하여 분원자기생산에서 확인된 그러한 공정으로 눈배기백자를 대량으로 생산, 판매하였다.

그 뒤 그러한 기법은 이 지역 안에서는 두말할 나위도 없고 널리 전파되어 근대적인 도자기 산업자본으로 전통사회의 수공업이 근대산업으로 승화되는 일은 도자기 부문 이외는 아직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우리들의 기업가 정신이 결여된 탓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주어진 여건, 특히 일본제국주의가 이 땅을 강점하여 민족기업을 모조리 말살하였기 때문이다. 홍주일(洪周一)은 운문산 기슭 말음에서 쇠부리를 근대적으로 계승하려고 동력기를 도입하여 송풍장치를 완성시키는 일에까지 성공하였고, 납청 유기산업도 이승훈(李昇薰)이 근대공장제기업으로 승화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투철한 민족주의자로서 전자는 청도에 문명학교를 짓고 후자는 평양에 오산학교를 세워 조국의 자주독립운동을 펼치다가 기업을 일으키는 데 실패하였다.

그런데도 오직 도자기업에서 근대산업으로 승화된 것은 그 전통이 연면하여 도자기의 생산자와 수요자층이 두터운 데다 전국 각지에 양질의 도토가 무진장으로 매장되어 있으므로 감히 일제가 이 산업을 노략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수공업

고유한 수공업의 전통은 연면히 승계되면서 끊임없는 진전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1876년 개항 이후 여러 가지 여건으로 우리 나라 수공업의 자생적인 발전은 억제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는 문턱에서 식민지적 노략질과 이에 합세한 자본제 상품의 강한 도전을 받게 된다. 이에 많은 부문의 수공업은 산업자본으로 승화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참하게도 소멸되고 말았다.

교활한 일제의 식민정책에 휘말려 우리 나라가 값싼 공업원료 공급의 보고로서, 또 기계제 상품의 시장으로 전락하였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러한 일반적인 식민지적 수탈도 잠깐 지나치고 나라와 겨레가 송두리째 빼앗기기 시작한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제는 군사적 침략전쟁을 시작하더니,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일으킨다.

전국이 소모전으로 변질되자, 1938년에는 이른바 <전시총동원령>을 칙령으로 공포하고 이 땅의 모든 요소를 총알받이로 밀어넣기 시작하였다.

1941년의 태평양전쟁 이래 5년 동안 젊은 남녀는 군인 · 군속 또는 정신대로 징발하여 무모한 전쟁의 희생물로 삼았으며, 모든 농산물 · 광산물 그리고 쇠 · 놋쇠 등 쇠붙이란 쇠붙이는 공출이란 명목으로 약탈해 갔다.

공출용 새끼꼬기와 가마니짜기가 일과로 바뀌었다. 이러한 것은 수공업이라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쇠점 · 놋쇠점 · 사기점 터는 남아 있지만, 편수는 징발되고 원자재는 약탈당하여 인적 · 물적 요소 중 갖추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처럼 수공업은 철저하게 소멸된다. 한편 <전시총동원법>에 의해서 군수품생산으로 개편되어 총독부의 이름으로 발표된 통계수치는 대부분 날조된 것이므로 전혀 참고자료가 되지 않는다.

광복까지 어디서든지 연명하고 있던 청장년 대부분은 환호하면서 귀환하고 묶여 있던 요소들도 일시에 풀렸다. 비록 남북의 분단, 6 · 25전쟁 및 외제의 범람 등 온갖 역경하에서도 다음의 요건은 우리 수공업을 근대산업으로 승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첫째, 전후 수요에 대한 특수경기이다. 폐허의 잿더미 속이지만 3000만 동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농산물 외에 온갖 가공품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둘째, 연면한 전통을 이어받은 여러 가지 기능자들은 허물어진 베틀간이라든지 사기점 · 옹기점 · 놋쇠점을 다시 손질하여 생산하기 시작하자 제품은 마치 날개돋친듯 팔려나간다. 이러한 수공업과 관련하여 온갖 산업이 파생하여 발흥, 발전한다.

셋째, 이제 광범한 농촌지역 자녀들도 중등 이상의 학교교육을 받을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민주공화체제의 헌법과 농지개혁 등에 의해서 2,000년 이상 토지를 매개로 하여 지배당하고 있던 농민이 법제적으로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양성된 각급 인력은 1960년에 이르러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립하고 실천하는 역군이 된다.

작은 수공업장이 중소기업으로 발전하고, 또 그들 중 일부는 오늘날 대기업으로 성장하여 고도산업사회를 이룩하는 데 기여하였다. 현대의 수공업은 대규모공업의 급속한 발전에 따라 위축되었다.

현대에는 대부분의 재화가 전통시대와 달리 대량생산, 대량소비되는 관계로 수공업제품은 생활용품이나 산업용품보다는 대체로 기호품이나 장식용품으로 이용되고 있다.

수공업제품은 일부지방에서 개별적으로 생산되는 것이 보통이다. 수공업에 이용되는 주요 재료는 나무 · 금속 · 피혁 · 보석 · 종이 등이다. 지역별로 전통적인 수공업제품은 전라남도 담양의 죽세공품, 경상남도 충무의 나전칠기, 경기도 강화의 화문석, 전라북도 전주의 한지, 경기도 이천 · 여주 · 광주와 전라남도 강진의 민속도자기, 충청남도 보령 · 웅천과 전라북도 장수 · 전주의 석공예품 등이 있다.

대체로 현대 수공업은 소자본에 의하여 소규모로 운영되고 있으므로 이에 관련된 내용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기는 어렵다. 현재는 죽세공품 · 등공예품 · 보석공예품 · 유리세공품 · 나전칠기 · 도자공예품 · 석공예품 · 전통가구 등 공예품 위주의 수공업 분야가 발전하고 있다.

≪한국경제연감≫(1988)에 따르면, 1987년 현재 공예품 관련업체는 493개 업체로 종업원 50인 미만인 업체가 90%를 차지하고, 이들 업체의 생산액이 전체의 63%를 차지하고 있다.

공예품 수출액은 1987년 현재 5억4826만 달러를 기록하였다. 소비자의 욕구가 다양화되고 개성있는 수공업제품의 수요가 증대됨에 따라 수공업의 새로운 발전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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