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비부(習比部 :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의 동쪽 및 동남쪽)의 나력(奈歷, 또는 奈林), 절야화군(切也火郡 : 지금의 경상북도 永川)의 골화(骨火), 대성군(大城郡 : 지금의 경상북도 淸道로 추정)의 혈례(穴禮)가 그것이다.
이들의 위치비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나력의 경우에는 경주 낭산설(狼山說)이 있고, 골화의 경우에는 영천의 금강성산설(金剛城山說)과 경주 북방의 금강산설(金剛山說), 혈례의 경우에는 대성군을 어디로 보느냐에 따라 청도의 부산설(鳧山說), 영일의 운제산설(雲梯山說), 월성과 영일 사이의 어래산설(魚來山說) 등이 있다.
또 삼산숭배의 기원에 대해서도 ① 신라의 핵이 되는 경주평야 중심의 사로국(斯盧國)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② 나력 · 골화 · 혈례가 각각 신라를 구성한 핵심세력인 사로국 · 골화국 · 이서국(伊西國)의 성산신앙(聖山信仰)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신라에서 삼산을 국가적 차원에서 숭배하고 제사한 것은 이들이 왕도 주변의 산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늦어도 고대국가 성립기부터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다가 삼국통일 후 당시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던 상당수의 명산대천이 신라의 영토로 편입됨에 따라, 이들까지 포함해 국가제사의 대상을 대사 · 중사 · 소사로 구분하는 등 사전(祀典)을 확대 재정비하였다. 삼산은 이러한 과정에서 대사에 편입된다.
당시 신라의 국가제사제도는 당나라의 그것을 상당부분 수용했으나, 당나라의 사전에는 없는 삼산을 사전의 최고 등급을 차지하는 대사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것은 신라의 중국 문화수용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흥미로운 사실이다.
신라에서 삼산을 특히 신성시하고 국가적 차원에서 제사한 것에 대해서는 신라건국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진한(辰韓) 삼국의 시조가 태어난 곳이라는 설명도 있다. 그러나 삼산에는 산신이 있어 위기에 처한 김유신(金庾信)을 구해주기도 하고, 경덕왕 때 대궐에 나타나 춤을 추기도 했다는 기록 등을 보면 이곳에는 왕도를 수호하고, 나아가 국토를 수호하는 산신이 있는 신성한 산이라는 설명이 타당하다. 따라서 삼산에 대한 제사는 호국산신에 대한 제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백제에서도 왕도 주변의 일산(日山) · 오산(吳山) · 부산(浮山)을 삼산이라 하였고, 산 정상에는 신인(神人)이 살면서 서로 내왕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이것 역시 호국산신에 대한 신앙이 아닌가 추측된다.